
1975년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출간 직후의 수전 브라운밀러. 수전 블라미스, 오월의봄 제공
브라운밀러는 이데올로기, 민족, 국가, 종교 등과 관계없이 성별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서 강간을 해석한다. 억압받는 계급으로서 여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강간이며, 정의롭고 진보적이라는 활동가, 연구자들조차 이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 책의 6장에 실린 인종 문제다. 백인 지배 사회에서 흑인 남성은 잠재적 강간범으로 여겨졌다. 인종 간 강간에 대한 공포는 타자를 형상화하는 데 효과적으로 동원된다.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독일과 점령지 주민들 사이에서 강간은 ‘우리의 여자들’을 지키지 못한 고통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이러한 강간 담론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사태 당시 SNS에서는 이슬람 남성들은 한국보다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고,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강간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는 말이 온라인상에 유포되었다. 이는 백인 중심 사회에서 흑인을 향해 쏟아냈던 말과 동일하다. 다른 인종, 국적을 가진 남성은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진 동물적 존재로 형상화되었으며, 여성과 아이들을 위협하는 존재로 가시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강간은 선전선동에 이용할 가치가 있을 때만 의미를 가진 말로 여겨진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강간은 언제나 여성이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영역으로 남는다. ‘협박’이 아닌 ‘동의’로 바뀌어야 할 정의 흑인민권운동 진영은 흑인 남성을 강간범으로 형상화하는 문제를 비판하고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을 강간하는 문제를 고발한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이중 억압으로 흑인 여성은 성폭력의 위협에 더 많이 노출되었다. 브라운밀러가 지적하는 부분은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강간할 경우다. 이때 백인 여성의 행실이나 태도는 사건에 중요한 변수가 된다. 백인 여성은 거짓말로 남성을 위험에 빠뜨린 나쁜 여자로 쉽게 매도되었다. 즉 인종 간 강간 문제를 사유할 때, 여성의 말이나 경험은 존중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흑인이 백인을 강간하면, 백인이 백인을 강간한 경우나 백인이 흑인을 강간한 경우보다 더 높은 처벌을 받았고, 흑인 남성은 백인 여성과 스치기만 해도 강간범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인종 간 권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인종과 계급이 아니라 성별을 중심으로 강간의 역사를 살펴보는 브라운밀러의 작업은 흑인 민권운동가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흑인의 인권을 향상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브라운밀러는 아주 단호하게 강간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고,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흑백을 막론한 모든 여성의 자유, 이동권, 열망을 짓밟는 통제기제라는 사실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교차로는 폭력이 난무하는 험악한 지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지대가 존재하지 않는 양 가정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미국에서 ‘여성의 의지에 반해’라는 강간의 정의가 “피해자의 동의 없이 어떤 신체 부위나 물건을 질이나 항문에 삽입하는 행위 또는 타인의 성기를 입에 삽입하는 행위, 삽입이 얼마나 가벼운 정도로 이루어졌는지는 상관없음”으로 바뀐 것은 2014년이었다. 지금 한국 사회도 강간죄의 구성 요건을 폭행이나 협박이 아닌 동의로 바꿔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피해자의 ‘의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경험을 듣는 법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허윤 문학연구자·부경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