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팬지 아유무가 ‘아유무 게임’을 하고 있다. 화면에 무작위로 숫자가 뜬 뒤 순식간에 사라지면, 작은 숫자부터 큰 숫자 순으로 위치를 찾아 누른다. 교토대 제공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에서 야생 오랑우탄과 함께 살며 연구했던 영장류학자 비루테 갈디카스의 말을 들어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오랑우탄에게는 일종의 서식권역이 있는데, 그는 자기 영역 숲속의 모든 것을 안다. 우리가 보기에는 똑같이 생긴 나무도 재질과 길이에 따라 주소를 부여하며, 길짐승과 날짐승 그리고 작은 벌레의 출몰 장소와 이동 경로, 장소에 따른 바람의 질감, 햇빛 각도 따위도 잘 안다. 숲에서 사물들은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지만, 그 패턴에 아주 작은 변형이라도 생길 경우, 오랑우탄은 즉각 알아챈다. 침팬지도 마찬가지다. 숲에서 그들의 먹이인 과일은 불규칙적으로 흩어져 있다. 작은 무리 생활을 하는 침팬지는 다른 일을 하다가도 과일을 재빨리 발견하고 그 장소를 기억하고 있어야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침팬지는 그런 환경에서 대대로 살았고 적응했기 때문에, 아유무가 보여준 기억력 신공은 차라리 일반적이다. 물론 아유무는 한 번도 숲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선대가 남긴 유전자 덕분에 ‘숲에서 찾기’의 기본 원리를 화면으로 가져온 ‘아유무 게임’에서 그가 (인간이 보기에) 천재적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런 능력을 가지지 못했을까? 자신도 자폐인이었던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은 자폐인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동물이 세상을 보는 방식과 비슷하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예상하는 것만 보게끔 되어 있다. 자주 일어나는 사건, 보이는 풍경 등 전형적인 패턴에 익숙하고, 그런 패턴을 찾도록 감각이 움직인다. 동시에 익숙한 패턴 밖의 정보는 모두 버림으로써 뇌 작동의 효율성을 기한다. 대신 두뇌 활동의 여유분은 언어적 사고를 하는 데 쓴다. 사실 언어도 패턴과 서사의 집합체이다. 인간은 그렇게 진화해왔다. 반면 동물들은 감각 정보를 다 받아들인다. 예상하는 패턴에 근접하지 않으면 바로 폐기 처분하는 인간과 달리, 사진을 찍듯 시각적 정보를 세세히 확인하고 처리한다. 프리드모어와 아유무 앞에 뜬 화면의 숫자는 무작위로 떴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패턴이 없는 영역에서는 인간은 동물을 앞설 수 없다.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지 않다. 동시에 동물도 인간보다 우월하지 않다. 둘은 다를 뿐이다. 바이러스 실험 대상 아닌 것만도… 아유무의 고향은 정글이 아니다. 그는 세계적인 영장류 연구기관인 일본 교토대 영장류연구센터에서 2000년 4월에 태어났다. 그의 엄마 ‘아이’는 아주 잠시나마 ‘야생’을 맛본 적이 있다. 그래봤자 한 달뿐이었다. 1977년 서아프리카 기니의 보수(Bossou) 숲에서 태어나자마자 밀렵꾼에게 잡혀 어미를 잃고 일본에 왔다. 아이와 아유무 연구로 지금은 세계적 학자 반열에 오른 마쓰자와 데쓰로가 신임 연구원이었을 때다. 그는 한 논문에 담담하게 글을 썼다. “아이는 연구소가 동물상에게 구입한 침팬지다. 그때만 해도 야생 침팬지 새끼를 수입하는 게 불법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만 1970년대까지 100여 마리의 야생 침팬지를 수입했다. 대다수는 B형 간염 연구를 위한 생화학 실험용이었지만, 아이는 언어 연구를 위해 영장류연구센터로 왔다.” 바이러스 주사를 맞다 죽어간 침팬지들보다 아이와 아유무가 행복하게 살았음은 분명하다. 연구소는 아이와 아유무가 게임을 하고 싶을 때 자유롭게 와서 하도록 했고, 정답을 맞힐 때마다 간식을 주었다고 한다. 이 연구소가 동물원이나 다른 시설에 비해 월등한 동물복지 수준을 갖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들은 왜 숲에서 과일을 찾지 않고 여기서 ‘아유무 게임’을 하게 되었나? 동물의 지능을 공표하기 위해 인간 세상에 파견된 대사라도 된단 말인가? 우리는 아유무를 통해 동물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었지만, 동물의 노동과 삶에 대한 불편한 역사가 존재해왔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자리, 침팬지의 자리 지금 스마트폰 구글플레이에 들어가서 ‘아유무 게임’을 내려받아 게임을 해보라. 당신은 아유무에게 질 수밖에 없고, 동물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이곳은 아유무의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도. 남종영 <한겨레> 기자 fandg@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