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달하가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일궜는데도 관서지방 사람들의 신망을 얻은 것은 또 다른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한 덕분이었다. 그는 1906년 10월 서우학회 설립을 주도한 12명의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창립회의 개최 장소가 김달하의 저택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초창기부터 깊숙이 관여했음이 분명하다. 독립운동 지도자와 허물없이 지내 서우학회는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출신 관료·신지식층 집단이 설립한 애국계몽운동단체다. 을사조약 이후 이른바 일본 보호국 체제하에 합법·공개적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학교 설립과 잡지 발행 등 비정치적 영역 활동만 허용됐지만, 관서지방을 무대로 애국주의 열기를 고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달하는 서우학회 임원진이었다. 재정 총괄 직책인 ‘회계원’으로 선임됐고, 일반 회무의 의사결정 과정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단체 설립 이듬해에는 모든 업무를 지휘하는 ‘총무원’이자 부회장에 선출됐다. 서열 2위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관지 발행에도 주도적이었다. 월간지 <서우>를 냈는데, 전체 15개 호 가운데 6회분 글을 썼다. 기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빈번하게 투고했음을 알 수 있다. 1906~07년 두 해 동안 서우학회에서 발휘한 김달하의 눈부신 활동상은 1908~09년 서북학회에도 계승됐다. 서북학회는 관서지방을 관할하는 서우학회와 관북지방을 무대로 하는 한북흥학회, 두 단체를 통합한 것이다. 가장 영향력 있는 애국계몽운동단체라 해도 좋았다. 여기서도 김달하는 ‘총무’직을 수행했다. 기관지 편집원 등의 직위도 갖고 있었다. 김달하가 관서 사람들의 신망을 얻은 이유를 알 만하다. 이승훈이나 안창호와 같은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정도 수긍이 간다. 김창숙이 그와 허물없이 지낸 것도 자연스럽다 하겠다. 김달하는 베이징의 조선인 망명자 사회에서 반일 유력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보기를 들면 1921년 3월1일 저녁에 베이징 조선인 14명이 3·1운동 기념연회를 은밀히 열었는데, 그 속에 김달하가 있었다. 신채호, 김좌진, 서왈보, 한진산 등 이름 높은 반일 인사들이 참석한 자리였다.4 또 일본공사관 경찰은 비밀리에 ‘베이징 거주 요시찰 조선인 리스트’를 작성했는데, 28명 명단에 어김없이 김달하 이름도 있었다. 그런데 김창숙은 언제부턴가 김달하에 관한 추문이 돌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일본 경찰 간부와 은밀히 만난다는 소문이었다. 일본 밀정인 것 같다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일축했다. 김창숙은 그를 믿었다. 김달하의 교제 범위가 넓다보니 남들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다. 김달하가 베이징으로 망명한 때는 1913년이다. 10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게다가 서울에 있던 가족까지 모두 불러들여 10여 명의 대가족 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그동안 중국 정부기관에 취직도 했다. 북양 군벌정권의 거두 돤치루이의 부관으로도 일했다. 교제 범위가 신진 망명자보다 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창숙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1925년 초였다. 김달하의 초청으로 둘만의 은밀한 대화 자리가 만들어졌다. 김달하는 독립운동이 성공할 가망이 없다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은 끝에 마침내 폭탄 발언을 했다. 조선으로 귀국하라는 권유였다. 당신같이 학덕 높은 유학자는 경학원에 들어가서 유교를 진흥하는 일에 종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경학원의 제2인자 자리인 부제학으로 취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조선총독부에 교섭해 이미 승낙까지 받아놓았다는 말도 했다. 요컨대 독립운동을 청산하고 식민지 통치체제에 투항하라는 권고였다. 김창숙은 격노했다. 말리는 손을 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김활란의 언니와 ‘치우친’ 결혼 김창숙은 동지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겪은 일을 폭로했다. 김달하의 정체가 뭔지 증언했다. 그는 독립운동가 회유 공작에 임하고 있으며 일본을 위해 일하는 밀정임이 틀림없다고 단언했다. 독립운동을 와해하려는 범죄자이므로 마땅히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5년 3월30일 김달하가 자택에서 피살됐다. 그 정황을 전하는 여러 문서가 있는데, 그중 두 기록이 주목된다. 하나는 사건 두 달 만에 게재된 <동아일보>의 상세한 보도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해방 뒤 간행된 <약산과 의열단> 기록이다. 양자는 같은 점도 있지만 세부적으로 차이가 크다. 양자의 공통성을 기반으로 사건 골격을 재구성해보자. 밀정 처형 집행자는 둘이다. 반일 비밀결사 구성원인 이인홍과 이기환이다. 어떤 비밀결사인가. 자료에 따라서 의열단이라고도 하고 다물단 소속이라고도 한다. 김창숙이나 이은숙(이회영 부인) 등과 같이 당시 베이징에 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다물단’이라고 지목하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물단은 베이징을 주요 활동 공간으로 삼아 아나키스트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의열투쟁 단체였다. 처형 장소는 김달하의 자택이다. 베이징 북쪽 안정문 차련호동 서구내로 북문패 23호다. 식구 10여 명이 사는 규모가 큰 집이었다. 두 집행자는 권총으로 가족 구성원을 위협해 결박했고, 김달하를 외떨어진 공간으로 이끌고 갔다고 한다. 처형 방법은 교살이다. 권총을 사용하면 총소리가 집 밖으로 울려퍼질 것을 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검 목에는 한 오라기 새끼줄이 감겨 있음이 발견됐다. 망명자임에도 가족이 많은 점이 눈에 띈다. 김달하는 1909년 이화학당에 재학 중인 19살 김애란과 결혼했다. 당시 42살이던 신랑과 나이 차이가 23년이나 지는, 몹시 치우친 혼사였다. 김달하는 두 번 상처했으며 아들 오형제를 둔 홀아비였다.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김달하는 가난한 처가를 위해 집을 한 채 사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김달하·김애란 부부는 결혼 뒤 5년 만에 베이징으로 이민 갔으며, 그곳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처갓집 식구를 불러들였다. 1921년 가을 장인, 장모, 처남 식구가 대거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사건이 일어날 때 그 집에는 김달하·김애란 부부가 낳은 두 딸 외에 전처 소생의 다섯 아들과 처갓집 식구까지 모두 12명이 살았다. 뒷날 미국 유학 이후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은 바로 김애란의 여동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