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판적인 시스템의 수혜자 1990년대 중후반 무렵부터 대학 경쟁력 강화가 대세가 되었다. 김대중 정권은 신지식인 담론을 퍼뜨리면서 지식의 성격 변화를 요구했다. 대학은 자본 축적에 유용한 지식을 생산하는 기지가 되어야 했다. 놀고먹는 교수에 대한 공분에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었다. 교육부 산하 한국학술진흥재단(한국연구재단의 전신)의 기준에 부합하는 학술지만 등재지로 지정되고, 등재지 논문만 연구 실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재야 연구소들은 대개 학회로 전환하여 제도권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주류가 되었다. 대중을 향해 서점에 깔리던 독립 학술지들은 학회 회원에게만 우송되는 등재지가 되었다. 과장하자면 필자와 심사자를 제외하면 아무도 읽지 않는 잡지가 되었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무엇보다 민중을 향한 연구는 점차 자리를 잃어갔다. 비판적 교수지식인 대다수는 독립성을 포기하고 변화에 적응해갔다. 정부와 언론은 대학 평가로 대학을 줄 세우고 서열을 공고화했다. 정부와 기업의 프로젝트 수주가 교수의 능력 척도가 되었다. 진보적 교수들이 두 정권 동안 교육부 장관 등 고위 공직에 꽤나 진출했고, 지금 다시 권한을 쥐고 있지만 정부의 대학 정책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이제 대학과 교수는 국가권력과 자본에 종속되었다. 또는 스스로 지식권력의 일부가 되었다. 진보적 교수지식인은 대부분 이 흐름에 비판적이다. 하지만 그가 녹을 먹는 시스템은 그렇지 않다. 교수 조국은 대학 서열의 정점 서울대 교수이자 법학 분야 등재지 논문 피인용 횟수 1위의 훌륭한 학자였다. 그도 이 시스템에 비판적이었을 것 같다. 동시에 그 시스템의 수혜자이기도 했다. 시기하는 게 아니다. 오늘날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대학교수가 감당해야 할 딜레마의 일단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암울하지만 이런 변화는 세계사적 흐름이기도 하다. 19세기에 확산된 유럽의 근대적 대학 모델은 구체제에 맞서던 부르주아의 가치관을 반영하여 독립적으로 사유하는 교양시민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진리 탐구를 위한 상아탑이라는 대학의 이상이 거기서 나왔다. 이 모델 아래서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이 말하는 ‘자유롭게 떠도는 지식인’이 탄생했고,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그람시의 ‘사회계급의 신경 노릇을 하는’ 유기적 지식인도 등장했다. 자기 출신 계급에 맞서 실천하는 지식인이 주목받게 된 배경이다. 지난 시기 한국 사회에서 존경받던 지사형 교수지식인 또한 이 모델 아래서 가능했다. 그 시절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다. 상아탑 모델은 2차 대전을 거치며 미국에서 탄생한 연구중심대학, 산학협력 모델로 대체되었다. 대학은 고도화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지식을 생산하여 생산력으로 직접 전화하도록 재구조화되었다. 이 지식생산체제는 미국의 지적 헤게모니 아래 확산되었다. 서구에서 ‘지식인의 죽음’이 화두가 된 것은 이미 1960년대의 일이다. 한 일간지에서 ‘지식인의 죽음’을 연재한 것이 2007년이니, 서구와 한국의 시차가 그만큼이다. 중상류 계급이 된 비판적 교수지식인 대학은 민중의 삶과 유리되었고, 높은 등록금과 서열구조로 오히려 고통의 원천 중 하나가 되었다. 비판적 교수지식인은 대개 중상류 계급이 되어 있고, 열심히 연구하고 교육해서 인정받을수록 이 시스템을 강화하는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 조국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분노는 지사형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오랜 믿음이 깨진 데서 나왔겠지만 현실은 한참 전에 변해 있었다. 그래서 이 분노는 특정 개인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이 시스템에 무기력하게 적응해온, 나를 포함한 이른바 비판적 지식인 일반에 대한 분노라고 읽어야 한다. 대학을 포기하고 바깥에서 새로운 지식 생산 거점들과 유기적 지식인이 등장하기를 기대해야 할까? 어려운 길이다. 물론 예외적 개인은 늘 있는 법이어서 지금도 대학 안에는 훌륭한 지식인이 적지 않다. 그들을 믿어 대학을 공공자산으로 개조하고 비판적 지식인을 지키는 데 집중해야 할까? 어느 방향이든 우리의 논의는 많이 늦었다. 그래서 지금 논쟁해야 한다. 조형근 사회학자·한림대 일본학연구소 HK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