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송아지는 어머니의 정성을 알았는지 한 달쯤 지나니 많이 좋아졌습니다. 한 2년만 키우면 송아지를 낳고 또 그 새끼가 새끼를 낳을 것입니다. 소를 늘려 다수리 논을 사서 이사도 하고 부자가 될 꿈을 꿉니다. 어머니의 꿈이 한창 부풀어오를 때입니다. 아버지가 으슬으슬 춥고 떨린다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아버지지만 병 앞에서 속수무책입니다. 한 사흘은 춥고 떨리고 하루는 괜찮은 하루거리(하루씩 걸러서 앓는 학질로 ‘초짐’이라고도 함)에 걸렸습니다. 배냇소로 주고 농어소로 주고 가장이 농사철에 일을 못하고 앓다보니 농사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겨우 나물을 뜯어 나르고 어머니가 장에 내다 팔아 쌀 한 됫박 사다가 나물에 어쩌다 쌀 한 알 보이는 죽을 끓여 먹고 삽니다. 너무 못 먹어서 할머니와 아이들까지도 얼굴이 퉁퉁 부었습니다. 사람들이 송아지를 팔아서 양식을 사먹으라고 합니다. “이 미련한 사람아, 온 식구가 다 죽은 다음에 소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합니다. 우리 집에서 송아지는 그냥 소가 아니라는 걸 사람들은 알 리 없습니다. 우리 송아지는 가족이기 때문에 생사를 같이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이 굶어죽으면 같이 죽고 살아나면 같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저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애쓰다보니 한 해가 갔습니다. 다시 봄이 되자 아버지도 그 지긋지긋한 초짐에서 놓여났습니다. 힘써 일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소 노릇을 못한다던 송아지는 버젓한 암소로 자라났습니다. 새끼를 낳기 시작합니다. 해마다 암송아지를 낳습니다. 송아지가 커서 또 새끼를 낳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떻게 하든지 소를 10마리 이상 늘려서 다수리 논을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소가 점점 불어납니다. 사람들은 우리 암소가 삐루갱이가 다 파먹어 비실거리던 송아지라는 걸 다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 집 암소는 새끼를 잘 낳는 소로 소문이 났습니다. 새끼를 잘 낳으니 많은 사람이 배냇소(소를 데려가서 먹이고 돌보며 2년 안에 송아지를 낳으면 송아지는 빌려간 사람이 갖고 소는 도로 돌려주는 제도)로 달라고 합니다. 황소는 농어소(큰 소를 데려가 농사를 지으며 키워서 1년 뒤 돌려주는 제도)로 주었습니다. 마지리에 사는 봉균이네가 농어소를 달라고 여러 번 부탁해 잘 크는 황소를 주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자 그 집 이웃 아저씨가 소를 죽이지 않으려면 소를 도로 데려가라고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먹이를 안 주고 배고파 소리를 지르면 지게 작대기로 때리는 걸 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사람이면 설마 그럴 리 있겠느냐고 가보았더니 뼈에 가죽만 씌워 있습니다. 소를 보자 눈물이 와락 솟는 걸 억지로 참고 “이 사람아, 소가 왜 그리 삐쩍 말랐나” 물으니 “세상에 그렇게 입이 짧은 소 새끼는 처음 봤소. 뭘 줘도 잘 처먹어야 말이지. 그동안 먹인 품값이나 주고 도로 가져가소” 하며 거의 반말지거리를 합니다. 아버지는 너무 화가 나서 봉균이라 안하고 봉갱이 이놈 평생 놀고먹고 잘살아라 하며 소를 몰고 왔습니다. 잘 먹이니 금세 살이 올랐지만 불쌍해서 다시 남의 집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삐루갱이 암소는 네 마리로 불고 내가 갓난아기일 때 우리 집에 온 삐루갱이가 다 먹었던 암소는 새끼를 낳고 또 낳았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일학년이던 어느 가을걷이가 끝났을 때입니다. 배냇 소로 주었던 소도 돌아오고 농어소로 주었던 소도 돌아 왔습니다. 문푸래 꼭대기에 사는 나상호씨네는 암소를 배냇소로 데려가서 네 마리로 불려 소를 삼부자가 몰고 왔습니다. 그것도 소만 몰고 온 게 아니라 청차조 인절미를 해서 지게에 지고 왔습니다. 소를 잘 키워 와서 우리가 고마운데 자기네가 고맙다고 수수 백번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고동골 사는 낙현씨네도 살이 통통하게 오른 농어소를 몰고 왔습니다. 큰 소가 열한 마리가 되었습니다. 삐루갱이 먹었던 암소만 남기고 다 팔아 소원이던 다수리 논 일곱 마지기를 샀습니다. 어른들은 세월이 흘러도 어느 해 흉년에 살아난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우리 집이 밥술이나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삐루갱이 먹은 송아지 덕분이라고. 전순예 1945년생 <강원도의 맛>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