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한글날이면 바빠진다. 연대는 공공 영역에서 쉬운 말을 쓰자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김아리
2년 전 ‘김아리의 행복연구소’라는 문패 아래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들을 만나서 ‘행복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를 물었다. 당시 뜨거운 독자 반응에 힘입어 이번에는 ‘김아리의 그럼에도 행복’ 연재를 시작한다. 숱한 시련에도 훌훌 털고 일어나는 사람, 남들이 가지 않는 고된 길을 웃으며 걸어가는 사람, 죽음의 길목에서 행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묻는다. 당신에게 고통이란 무엇이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은 무엇이었는지. ‘행복연구소’가 행복의 이론 편이었다면, ‘그럼에도 행복’은 실천 편쯤 되겠다. 되도록 격주로 독자를 찾아갈 예정이다.
민주화운동으로 감옥에 두 번이나 갔지만, 간수 눈을 피해 화투판을 벌이고 요리 경연을 벌이고 감방을 꾸미는 등 징역살이의 고단함을 ‘놀이하는 인간’이 되어 돌파했다. ‘기업 내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복합문화 기업의 꿈을 갖고 세웠던 회사는 한때 직원 120명, 매출 100억원대까지 성장하며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았지만 12년 만에 망했고 개인파산까지 신청해야 했다. 사업하면서 나빠진 시력은 파산할 즈음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중국어를 배우고 드럼을 치고 색소폰을 불더니 마라톤까지 했다. 2012년부터 대표를 맡은 한글문화연대는, 남들이 ‘달걀로 바위 치기’라고 하던 교육부의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방침을 막아냈다.
투옥, 기업 도산과 파산, 시각장애에도 불구하고 ‘별일 없는 듯’ 살아가는 이건범(54) 한글문화연대 대표에게 숱한 시련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묻고 싶었다. 지난 10월7일 한글날을 앞두고 분주한 사무실에서 한글날을 빙자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 대표는 “한글날 관련 인터뷰인 줄 알고 응했다가 완전 속았다”면서도 흔쾌히 얘기를 풀어놓았다. 그에게도 삶은 ‘짧은 행복과 긴 고통의 반복’이었지만, 시련을 이겨내는 힘은 그 짧았던 ‘행복의 기억’에 있었다. 행복의 기억은 방향보다는 방식, 의미보다는 재미를 추구할 때 더 쉽게 만들 수 있었다. ‘달걀로 바위 치기’조차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로 변화시키는 삶의 마법도 만들어냈다.
농어촌 퍼실리테이터?
올해 한글문화연대가 가장 큰 방점을 둔 일은 무엇이었나.
공공언어를 쉬운 말로 바꾸는 일에 집중했다. 공공언어란 정부 부처 등 공공기관에서 만들고 대개 언론을 통해 유통되는 말인데 시민의 권리나 재산, 안전, 행복 추구 기회 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정보를 담고 있어 이것을 쉬운 말로 바꾸는 게 우리 운동의 가장 큰 좌표이다. 18개 중앙 부처에서 나오는 보도자료가 한 달에 1천 건 정도 된다. 지난해까지 석 달 치를 조사해서 쓸데없이 외국어나 로마자, 한자로 쓰고 있는지 조사해서 발표했다. 장관 성향에 따라 고치려고 노력하는 부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별로 효과가 없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1년에 나오는 보도자료 1만2천여 건을 모두 조사해 문제가 있는 보도자료를 쓴 공무원에게 직접 공문을 보내고 있다. “국어기본법 제14조 1항 공문서 작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공공기관은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 그리고 한글로 공문서를 써야 한다고 나와 있는데 당신은 그 국어기본법을 어겼기 때문에 계속 반복할 경우 실명을 공개하거나 감사원에 감사 청구를 하겠다”고. 7월부터는 신문사 11곳, 방송사 9곳의 정치·경제·사회 기사를 분석해 해당 기자들에게 ‘우리말과 쉬운 말로 써주면 좋겠다’는 전자우편을 보내고 있다. 예를 들어 보이스피싱은 사기전화, 싱크홀은 땅꺼짐, 스크린도어는 안전문, 그린푸드존은 어린이식품안전구역 등으로 고치도록 부탁한다. 한글문화연대가 보기에 <한겨레>도 문제가 많나. 가장 문제가 적다. 100점 만점에 90점 정도다. 한국 사회에 노동·빈곤·교육 등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많아, 한글운동은 시급한 호소력을 갖기 어려울 거 같다. 일제 해방 뒤 우리말을 다시 찾아야 했기에 과거 한글운동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특히 박정희 독재정권은 자신을 민족주의적 색깔로 치장하기 위해 한글 전용이나 강제적인 외국어 순화를 하다보니 심한 거부감을 주기도 했다. 1990년대 세계화 흐름 이후 지금은 영어를 잘하는 사람에게 권력이 가고, 영어를 못하는 국민은 ‘이등국민’으로 전락하고, 영어로 인해 정보·지식이 독점되고 장벽이 쳐지고, 의사소통에서도 층이 생기게 됐다. 영어가 학력과 재산 형성에 차별을 끼치는 것이다. 우리는 국민의 알 권리, 평등권 관점에서 한글운동을 본다. 말로써 시민의 알 권리를 존중하고 보장해줘야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고 평등권을 누릴 수 있다. 행복추구권 역시 알 권리를 누릴 때만 보장된다. 외국어를 남용하면 국민의 외국어 능력에 따른 차별과 알 권리의 격차를 만들어내 실질적인 피해를 입힌다. 그래서 적어도 공적 언어에서는 한국어를 쓰자는 거다. 복지를 다루는데 ‘커뮤니티 케어’라는 말을 쓰고 농어촌공사 자격증을 발급하는데 ‘농어촌 퍼실리테이터’라는 말을 쓴다. 이게 뭐 하자는 짓인가. 안 보는 게 속 편한 것도 있으니까 과거 이력으로 볼 때 빈민·노동·교육 등의 운동에 투신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한글운동에 매진하는 이유는 뭔가. 2000년 사업하고 있을 때 한글운동을 만났다. 대충 힘을 보태면 되는 동아리 활동 정도로 생각하고 동참했다. (웃음) 당시 단체가 회의할 공간이 없어 내 회사 공간을 내줬고, 간사가 있을 자리가 없어 내 사장실 한쪽에 책상을 마련해줬다. 간사가 옆에서 일하니 나에게 많이 물어보고 나는 많이 대답해주고, 그렇게 많이 도와주다보니 많이 알게 되고, 많이 알게 되니 더 많이 일하는 ‘악순환’이 벌어지면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됐다. (웃음) 교육이나 복지 운동에도 발을 걸쳤는데, 거기는 나 말고도 사람이 많지만 여기는 절대적으로 사람이 적으니 매진하게 됐다. 두 번의 투옥, 기업체 운영과 파산, 시각장애 등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보통 사람들과 달리 크게 흔들리지 않고 사는 거 같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회복탄력성’이 뛰어난 거 같다. 나도 남들처럼 똑같이 아프고 쓰렸다. 그때마다 내가 더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 마음을 붙이려고 노력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사람이 바로바로 갈아타고 가볍다는 거다. (웃음) 그런 면에서 시름에 너무 오래 잡혀 있지 않고 회복탄력성이 남들보다 좋은 거 같다. 투옥과 기업 파산, 시각장애 중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었나. 과거의 고통은 다 잊혔으니까, (웃음) 지금 고통인 시각장애가 가장 크다. 최근에 더 악화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삶의 폭도 만나는 사람도 줄었고,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것은 늘어났다. 특히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소통하는 정보통신 시대에 시각장애인은 더 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워졌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안 보는 게 속 편한 것도 있으니까. (웃음) 선천적 장애보다 후천적 장애가 주는 고통이 더 크다고 한다. 그래서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분노하고 묻는 시간이 길다고 한다. 그걸 누구에게 물어보겠나? 어머니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웃음) 대신 어머니가 나에게 물어보신다. “우리 식구 중 이런 병이 있는 사람이 없는데 왜 네가 이렇게 됐냐”고. (웃음) 다행히 갑자기 하나도 안 보인 게 아니라 서서히 나빠져서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받아들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시력이 안 좋은 이 대표는 몇몇 특수 장비의 도움을 받아 컴퓨터 작업을 한다. 김아리
그의 요즘 재미는 노래다. 지난 3월 독창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 대표. 이건범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