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 박두만(송강호 연기)은 직감과 관상으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영화사 제공
16살 소녀 캐슬린 크로웰은 넋이 나간 얼굴로 밤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찢긴 옷 여기저기에 흙이 묻어 있었다. 주변을 돌던 경찰이 이유를 묻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식당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데 차 한 대가 갑자기 와서 멈추더니, 젊은 남자 세 명이 앞을 가로막았어요. 그중 두 명이 저를 차 뒷자리로 밀어넣고 한 사람은 앞자리에 앉았고, 다른 사람은 제 옷을 찢고는 저를 강간했어요. 그리고 깨진 맥주병으로 제 배에 글자를 그어대기까지 했어요.” 8년 뒤 대반전 경찰은 인근 병원으로 크로웰을 이송했다. 그녀의 몸에서 범인 것으로 보이는 정액이 검출됐으나 안타깝게도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았다. 경찰은 꾸덕꾸덕 말라버린 소량의 정액을 채취했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건 냉동 보관이 전부였다. 사건 당시(1977년)에는 DNA 지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에 정액 상태가 좋았던들 범인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범인으로 지목된 게리 돗슨은 범행을 부인했지만 소용없었다. 피해자 크로웰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그의 범행을 입증하는 과학 증거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크로웰 속옷에서는 범인 것으로 보이는 체모가 발견됐다. 모발비교분석법(Hair Analysis)으로 분석해보니, 게리 돗슨과 ‘일치’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돗슨은 단기 25년, 장기 5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됐다. 8년이 지난 1985년 대반전이 일어났다. 사건이 날조됐다는 양심선언이 터져나왔는데 다름 아닌 피해자인 크로웰에게서 나왔다. 남자친구와 성관계 뒤 임신이 걱정됐던 크로웰이 양부모의 꾸중을 피하려 성폭행 사건을 꾸몄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래도 돗슨은 감옥에서 나올 수 없었다. 재판부가 크로웰의 양심고백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 크로웰이 했던 진술은 사건을 실제 겪은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깨진 맥주병으로 배에 글씨를 썼다는 얘기를 과연 지어낼 수 있을까. 정신적 충격이 심했던 크로웰이 사건 자체를 잊고 싶어 기억을 왜곡했다고 보는 게 차라리 상식적이었다. 게다가 모발비교분석법이라는 과학 증거까지 있는 상황 아닌가. 1988년 법조 역사는 바뀌고 말았다. 3년 전 세상에 탄생한 DNA 분석 기법으로 말라버린 정액을 검사했고 해당 정액이 사건 당시 크로웰의 남자친구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사건이 가져온 충격은 꽤 컸다. 이를 기점으로 재소자들의 DNA 검사 요구가 빗발쳤다. 이후 DNA 검사로 362건 넘는 오판이 발견됐다. ‘362’라는 숫자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한국 기준으로 연간 26만 건(2017년 기준) 넘는 형사재판이 이루어진다. 몇 년에 걸친 형사재판 가운데 고작 362건이면 꽤 봐줄 만한 오류율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DNA 검사가 가능했던 사건은 극히 일부였다. 일단 형사사건 중 DNA 증거가 있는 것은 체액이 등장하는 성폭행이나 살인 같은 중대 폭력 사건뿐이다. 게다가 재판 이후에도 DNA 시료가 무사히 보관돼야 하는데 이런 좁은 문을 통과한 사건 중 362건이 오판이었다면 그 수치는 결코 작지 않다. 숨겨진 오판은 더 많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었다. 살인범 중 전갈자리가 많다? 오판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미국에선 이것을 분석했는데, 충격적인 사실은 오판으로 밝혀진 사건 중 74%(250건이 밝혀진 시점에서 185건)에 과학수사 기법이 동원됐다는 것이다. 사람은 거짓말할 수 있다지만 과학이 거짓말할 수 있단 말인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랬다. 별자리 운세(살인범 가운데 탄생 별자리가 전갈자리인 경우가 많으니, 전갈자리 탄생자가 살인사건 용의자일 확률이 높다) 수준의 기법이 검증도 없이 수사에 쓰여 억울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감옥에 가두고 진범은 활개 치고 돌아다니게 했던 것이다. 윤씨를 화성 연쇄살인 사건 8차의 범인으로 몰았던 거짓말탐지기, (나름의) 프로파일링은 여전히 현실 수사에서도 쓰이고 있다. 그리고 근거가 의심스러운 방사성동위원소 분석법 같은 점성술 수준의 기법이 여전히 쓰이고 있다. 윤씨 사건에 쓰였던 수사법의 문제는 무엇이고, 지금도 현실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과학수사 기법은 뭘까? 앞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보겠다. *필자는 <왜 나는 그들을 변호하는가> 저자이자, 예현 법무법인 변호사다. 남들이 포기한 사건, 패색이 짙은 사건을 되살리는 데 힘쓰고 있으며, 형사 사법 절차 개선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확신의 오류’ 기획연재를 통해, 필자는 과학수사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질문한다. 고전적인 과학수사 방법인 거짓말탐지기, 필적감정, 목소리 성분분석, 진술 분석 등부터 CCTV, 사이코패스 테스트, 시신 부검, 프로파일링까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진실과 얼마나 부합할까. 과학이란 이름 속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구체적인 사건들을 분석하며 과학수사의 현주소와 맹점 등을 파헤칠 예정이다. 신민영 변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