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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살이 가니 인기가 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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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3-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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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는 기상캐스터 한우경씨의 살과의 전쟁…암흑의 사춘기 벗어나 자신감 되찾기까지

사진/ (이용호 기자)
살이 살떨리는 화두로 떠오른 지도 오래 됐다. 비만은 건강파괴의 주범으로 찍혔고, 다이어트는 거대산업이 됐다. 선사시대 비너스상은 듬직한 체구를 자랑했고, 중세시대 미의 기준은 허릿살이 몽글몽글 접히는 풍만한 몸매였지만, 요즘 “부잣집 맏며느릿감”이란 말은 그저 듣기 좋으라는 인사말이 돼버린 느낌이다.

한국방송 9시 뉴스의 기상캐스터 한우경(27)씨가 그런 소리를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랐다는 사실은 잘 믿어지지 않는다. 그에게서 ‘살’의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살로 인해 겪어야 했을 고뇌와 아픔의 자취 또한 발견할 길 없다. 생글거리는 미소, 하이톤의 맑고 경쾌한 목소리는 보도국의 카메라 앵글을 벗어나서도 여전히 빛났다. 그래도 그가 살과의 치열한 전쟁 속에 “지옥 같은 사춘기”를 보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신체검사장. 그는 저울에 올라서기가 몸서리치게 싫었다. “괜찮다”는 선생님의 거듭된 권유에 머뭇머뭇 겨우 발을 올렸다. 바늘은 반바퀴를 넘게 돌고서야 간신히 멈춰섰다. 75kg. “너무 창피해 눈물이 다 나왔어요.” 그때부터 ‘한우돼지’가 그의 이름을 갈음하는 공식 별명이 됐다.

“예쁜 애들은 다 죽이고 싶다”


그로부터 15년, 그의 극적인 변신담이 텔레비전 전파를 타고 온 나라에 소개됐다. 3월3일 에서 그는 초등학교 때 옛 친구와 반갑게 포옹했다. 아이들이 그의 ‘살’을 놀려댈 때마다 말리며 꿋꿋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던 같은 반 반장 최누리씨였다. 최씨는 방송에서 “다른 아이들이 다들 우경이를 ‘한우돼지’라고 놀렸지만, 나는 그렇게 놀리는 게 마음이 불편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로 누리는 멋진 남자로 완전히 떴죠 뭐. 언제 밥 한번 사라고 할 거예요.”

하지만 정말로 두둥실 뜬 건 한우경씨 자신이다. 영화 속 얘기 같은 그의 추억담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7∼8%를 오가던 시청률이 15%를 넘었다고 해요. 3월 재방송 때도 많은 분들이 보셨다고 하고요.” 인터넷의 프로그램 다시보기를 클릭하는 손길도 같은 프로 다른 이야기들의 네다섯배에 이른다. “이제는 오가며 만나는 분들이 ‘어머, 한우경이야’ 하고 아는 체를 하세요.” 전에는 길거리에서 그를 알아보더라도 자기들끼리 “누구지?”하면 귀엣말하듯 “왜, 거 날씨, 날씨” 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의 개인 홈페이지(www.hanwookyung.com)를 찾는 이들도 부쩍 늘었다. 다음카페의 팬클럽 사이트엔 200여명 정도이던 회원이 한달 남짓 사이 600명에 육박하였다. “진솔한 얘기에 용기와 희망을 찾았다는 글들이 많이 올라와요. 학교 선생님 한 분은 살로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교육용으로 그 프로를 녹화해서 보여줬다고도 하시더군요.”

인터뷰 요청도 물밀듯이 밀려든다. 이달에만 10여개의 매체들과 인터뷰를 했다. MC를 맡아달라는 제의도 넘쳐난다. 그는 지금 TV 9시뉴스와 라디오 <한우경의 날씨이야기>를 진행하고 있고, 의 MC로도 활동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봄 개편을 앞두고 온갖 프로그램에서 그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도국 소속인 만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만 한정했으면 좋겠다”는 보도국의 요구와 “우리 프로를 맡아달라”는 PD들의 섭외열기 사이에서 그는 지금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의 상쾌한 스타트를 끊은 듯한 그지만, 예전의 기억을 다시 돌이키면서는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초등학교 이후 대학교 1,2학년 때까지도 계속 살로 고민해야 했어요.” 조금씩 빠지긴 했지만, 꽤 오랫동안 그의 몸무게는 70kg대를 오르내렸다. 고대 국문과 시절 60kg대에 머물던 체중계의 바늘이 지금은 51, 52kg을 왔다갔다 한다. “사춘기 때는 정말 치명적이었어요. 오죽하면 ‘예쁜 애들은 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을라고요.”

“남자친구는 없었느냐”는 물음엔 가볍게 눈까지 흘겼다. “내가 어떻게 남자를 만나요. 죽어라고 공부만 했다니까요. 정말 그땐 할 게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대학교 1학년 때까지도 좀 풍성한 편이었어요. 그러다 2학년 무렵부터 제법 남자들이 쫓아다니더라고요.” 처음엔 그런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남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없지 않았거든요. 뚱뚱할 때는 아는 척도 안하다가 좀 볼 만해지니까 저러는구나 싶기도 했고요.”

사실 이번에 에 출연한 것도 원래는 그렇게 스스로 먼 존재로 남겨둬야 했던 첫사랑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방송에서 절 ‘한우돼지’라며 가장 많이 놀리는 역할로 나온 아이가 실은 제 첫사랑이었거든요.” 그 첫사랑 동창이 외국 출장을 나간 바람에 최누리씨를 만나는 것으로 설정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그애에게 말도 못 붙인 채 가슴앓이만 했어요. 이번 기회에 보란 듯이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 친구에겐 방송 직후 “네가 너무 악역으로 나온 건 내 뜻이 아니었다”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차츰 날씬한 사람에 대한 달라진 대접에 익숙해지면서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자신감이 많이 생겼어요. 고등학교 때까진 국어책도 못 읽을 정도로 수줍음이 많았어요. 동창회도 안 나가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어요. 그러다 사람도 많이 만나게 됐고 지금은 주위에서 ‘목소리가 두 옥타브쯤 올랐다’고 그래요.”

15년 동안 25kg 꾸준히 감량

다이어트 비법은 “정말 따로 없다”고 했다. 많은 이들이 이메일로 “어떻게 살을 뺄 수 있느냐”며 물어오지만 딱히 알려줄 게 없다고 한다. 방송 뒤 쏟아진 다이어트 광고 제의를 뿌리친 것이며 다이어트 비법을 소개하자는 여성지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15년 동안 25kg을 꾸준히 빼온 거예요. 전 누가 단기간에 살을 뺐다고 하면 반쯤 접고 보는 편이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운동을 거르지 않는 것이란다. 그는 지금도 날마다 두시간씩을 운동에 투자한다. “에어로빅에서 효과를 많이 봤지만, 운동을 가리지는 않아요. 달리기는 기본이고, 여름엔 수영, 겨울엔 스케이트도 자주 해요.”

그의 성공담이 가뜩이나 과열된 다이어트 강박증에 일조하는 결과를 빚은 것은 아닐까. “살찐 상태에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겠다는 게 한국사회에선 안 통한다는 사실을 절감했어요. 더구나 비만은 병으로 분류되는 건강의 적이 아닌가요. 저도 한때 다리 관절까지 나빠져 고생했다니까요.” 그는 얼마 전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공감하며 봤다고 했다. <브리짓 존스…>는 체형이 망가지기 시작한 노처녀가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차이라면 나는 살을 빼 바꿔보겠다는 의지를 따른 반면, 영화 주인공은 있는 그대로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은 것일 텐데요. 그렇게 느낀다면 굳이 살을 뺄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건강을 위한 운동만큼은 꼭 당장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네요.”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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