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인 메리 더글러스는 몸이 사회적 범주와 관심을 재생산하는 ‘자연적 상징들’의 체계이며, 몸의 경계를 엄격하게 유지하려는 열망은 사회적 체계 안에서 욕망의 규제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몸은 사회적 정체성과 위치를 나타내며, 우리는 “여성성과 여성의 미를 동질화하고 정상화하는 이미지와 이데올로기” 안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는 지배적인 문화 규범에 순응하도록 강제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자기 몸에 대한 만족도가 훨씬 낮고 그 집착은 훨씬 더 강하다. 마른 몸과 우아한 미소, 여성미의 기준 게다가 다이어트는 불확실성이 늘어나는 사회에서 통제와 안정감을 준다. 일이나 인간관계는 개인이 통제할 수 없지만, 몸은 내가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다. “현대의 몸 페티시즘(성도착증)은 점점 더 제어하기 힘들어지는 문화에서 자기 정복의 환상 이상을 나타낸다.” 한국 사회는 다이어트를 자기 계발이나 스펙의 일종으로 여긴다. 다이어트는 단순히 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력이나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면접이나 자기소개서에서 성공 경험으로 다이어트를 예로 들 정도다. 보르도는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에서 몸을 보는 사회의 시선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날씬함에 대한 관심은 우리 세기의 정상화 메커니즘 중 가장 강력한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감시하고 훈육하는 ‘유순한 몸’을 생산해내며, 이러한 몸은 사회적 규범에서 이탈하는 모든 것에 민감하고, 그 규범에 맞추기 위한 자기 변화와 자기 개선에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뚱뚱한 사람은 탐욕스럽고 자제력이나 의지력이 없는 게으른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거식증 환자의 야윈 몸은 현대 여성의 이상을 과장해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여성의 식욕 통제는 여성성을 규정하는 일반 법칙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일 뿐이다. 공적인 권력에 대한, 독립성에 대한, 성적 만족에 대한 여성의 배고픔(욕망)은 억제되어야 하며, 여성이 차지할 수 있는 공적 공간은 제한되어야 한다.” 미디어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사회적 공간을 차지한 근육질 남성 옆에 날씬한 여성을 배치함으로써 여성이 얼마나 연약하고 힘이 없는지 대조해 보여준다. 보르도는 거식증과 폭식증 같은 질병이 젠더로 생겨난 것이며, 개인의 기능 장애가 아니라 사회적 이유로 생겨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섭식장애는 사회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일종의 창문이다. 대중문화는 마른 몸과 우아한 미소를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해왔다. 성적으로 매력적이기 위해 말라야 하며, 그 매력이 방종한 섹슈얼리티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 정숙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가지를 지키려다보면 여성은 병에 걸린다. 거식증 환자는 여성에게 내린 규범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르고 예쁜 몸을 만들기 위해 식사를 거부하다가 아예 생식기능을 잃어버린다. 보르도의 지적처럼, 거식증은 20세기 여성성의 비극적 패러디다. 소설 <채식주의자> 영혜 몸속에서 전쟁 이런 측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영혜는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준다. 영혜는 육식 문화가 은폐한 죽음과 살육을 고발하며, 보양식을 요리해서 남편에게 먹여야 한다는 규범을 거부한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체중이 빠졌고, 거의 잠을 자지 않았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만큼 말을 잃었다.” 남편과 성생활도 불가능해진다. 자살 시도와 발작, 침묵과 식사 거부로 이어지는 영혜의 몸은 “생리는 멎은 지 오래고, 몸무게가 삼십 킬로그램도 안 되”는, “모든 이차성징이 사라진 기이한 여자아이의 모습”이다. 여성의 몸이 섹슈얼리티와 재생산을 위한 몸이라는 것이 젠더 규범이라면, 거식증은 이 규범을 모두 해체하는 셈이다. 영혜는 채식을 관철하기 위해 남편이나 아버지의 폭력과 맞선다. 거식증인 영혜의 몸은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강요한 이데올로기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건 영혜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섭식장애를 앓는 사람, 육식을 거부하는 사람, 체제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 등 모든 여성의 몸에서 이런 전쟁은 계속된다. 허윤 문학연구자
인류학자인 메리 더글러스는 몸이 사회적 범주와 관심을 재생산하는 ‘자연적 상징들’의 체계이며, 몸의 경계를 엄격하게 유지하려는 열망은 사회적 체계 안에서 욕망의 규제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몸은 사회적 정체성과 위치를 나타내며, 우리는 “여성성과 여성의 미를 동질화하고 정상화하는 이미지와 이데올로기” 안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는 지배적인 문화 규범에 순응하도록 강제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자기 몸에 대한 만족도가 훨씬 낮고 그 집착은 훨씬 더 강하다. 마른 몸과 우아한 미소, 여성미의 기준 게다가 다이어트는 불확실성이 늘어나는 사회에서 통제와 안정감을 준다. 일이나 인간관계는 개인이 통제할 수 없지만, 몸은 내가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다. “현대의 몸 페티시즘(성도착증)은 점점 더 제어하기 힘들어지는 문화에서 자기 정복의 환상 이상을 나타낸다.” 한국 사회는 다이어트를 자기 계발이나 스펙의 일종으로 여긴다. 다이어트는 단순히 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력이나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면접이나 자기소개서에서 성공 경험으로 다이어트를 예로 들 정도다. 보르도는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에서 몸을 보는 사회의 시선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날씬함에 대한 관심은 우리 세기의 정상화 메커니즘 중 가장 강력한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감시하고 훈육하는 ‘유순한 몸’을 생산해내며, 이러한 몸은 사회적 규범에서 이탈하는 모든 것에 민감하고, 그 규범에 맞추기 위한 자기 변화와 자기 개선에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뚱뚱한 사람은 탐욕스럽고 자제력이나 의지력이 없는 게으른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거식증 환자의 야윈 몸은 현대 여성의 이상을 과장해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여성의 식욕 통제는 여성성을 규정하는 일반 법칙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일 뿐이다. 공적인 권력에 대한, 독립성에 대한, 성적 만족에 대한 여성의 배고픔(욕망)은 억제되어야 하며, 여성이 차지할 수 있는 공적 공간은 제한되어야 한다.” 미디어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사회적 공간을 차지한 근육질 남성 옆에 날씬한 여성을 배치함으로써 여성이 얼마나 연약하고 힘이 없는지 대조해 보여준다. 보르도는 거식증과 폭식증 같은 질병이 젠더로 생겨난 것이며, 개인의 기능 장애가 아니라 사회적 이유로 생겨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섭식장애는 사회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일종의 창문이다. 대중문화는 마른 몸과 우아한 미소를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해왔다. 성적으로 매력적이기 위해 말라야 하며, 그 매력이 방종한 섹슈얼리티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 정숙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가지를 지키려다보면 여성은 병에 걸린다. 거식증 환자는 여성에게 내린 규범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르고 예쁜 몸을 만들기 위해 식사를 거부하다가 아예 생식기능을 잃어버린다. 보르도의 지적처럼, 거식증은 20세기 여성성의 비극적 패러디다. 소설 <채식주의자> 영혜 몸속에서 전쟁 이런 측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영혜는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준다. 영혜는 육식 문화가 은폐한 죽음과 살육을 고발하며, 보양식을 요리해서 남편에게 먹여야 한다는 규범을 거부한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체중이 빠졌고, 거의 잠을 자지 않았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만큼 말을 잃었다.” 남편과 성생활도 불가능해진다. 자살 시도와 발작, 침묵과 식사 거부로 이어지는 영혜의 몸은 “생리는 멎은 지 오래고, 몸무게가 삼십 킬로그램도 안 되”는, “모든 이차성징이 사라진 기이한 여자아이의 모습”이다. 여성의 몸이 섹슈얼리티와 재생산을 위한 몸이라는 것이 젠더 규범이라면, 거식증은 이 규범을 모두 해체하는 셈이다. 영혜는 채식을 관철하기 위해 남편이나 아버지의 폭력과 맞선다. 거식증인 영혜의 몸은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강요한 이데올로기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건 영혜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섭식장애를 앓는 사람, 육식을 거부하는 사람, 체제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 등 모든 여성의 몸에서 이런 전쟁은 계속된다. 허윤 문학연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