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된 현실을 은폐하는 ‘음란성’으로 가득찬 문화…비평의 역할은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것
한국문화의 고고한 엄숙주의, 도덕성을 함부로 의심하긴 힘들다. 때때로 그에 반발하는 ‘음란한’ 문화적 도전이 없지는 않았지만, 늘 그에 대한 대가는 엄혹했다. ‘음란물’을 썼다는 이유로 옥고까지 치러야 했던 장정일씨와 마광수씨가 대표적 예다. 그런데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이택광 지음, 이후 펴냄, 02-3143-0915, 1만3천원)는 그처럼 일부의 ‘음란한’ 도전을 희생양으로 삼곤 했던 지극히 도덕적인 한국문화의 주류야말로 실로 음란한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며 시비를 건다.
물론 이 책이 말하는 음란함이란 기윤실 또는 청소년보호위원회로 대표되는 도덕주의적 문화관에서 바라보는 음란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여기서의 음란이란 사람들의 뻣뻣해진 성욕을 더욱 감질나게 하는, 그리하여 건전한 도덕의식을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게 만드는 포르노물의 비도덕적 상징작용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흐릿하게 만드는 문화의 도착된 역할을 일컫는 것이다. 음란한 글이나 영상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순간순간의 자극적인 장면에 집중하느라 흔히 그 줄거리나 의미의 구조는 까맣게 잊어버리기 쉽다. 서사구조로부터 비껴나 단발적 묘사에 집중하게끔 만드는 문화의 작용, 그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는 음란함의 의미다. 이는 곧 마르쿠제나 보드리야르가 말한 ‘외설’과 다르지 않다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예진 아씨’에 깔린 욕망구조
왜 한국문화가 음란하다는 것일까. 우리 문화가 그만큼 모순된 사회 현실을 은폐한 채 사람들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장치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음란한 판타지’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판타지란 현실 아닌 허구의 세계에 대한 상상이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허구의 세계로 도피하는 문화란 음란한 동시에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서서 이 책은 친일문학, 한류, 멜로드라마, 황수정 사건, 유승준 사건, 강준만 현상, 한국 축구의 의미 등 한국문화의 온갖 사건과 현상들을 짚어나간다. 저자가 보기에 문화비평의 역할은 곧 이런 사건과 현상들에 감춰진 ‘리얼리티’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황수정 사건은 우리의 실제 현실을 덮어버리는 한국사회의 지배적 문화담론들의 ‘음란함’을 벗겨내고 감춰진 ‘리얼리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예진아씨’ 황수정씨가 마약 투입 혐의로 구속된 사건을 두고 전개된 논리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공인으로서 지켜야 할 본분을 황씨가 저버렸다는 것이고, 하나는 범법사실은 인정하더라도 여성 연예인의 프라이버시와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논리 모두가 황수정 사건의 기저에 놓인 현실의 욕망구조를 드러내는 데는 실패했다고 저자는 질타한다. 두 번째 ‘프라이버시론’은 황수정씨가 청순가련형 이미지를 팔아서 지금의 인기구조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기에 현실적 설득력을 잃는다. 첫 번째 ‘공인론’은 황씨에게 쏟아진 엄청난 비난의 열기를 황씨 개인이 잘못했기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으로 도덕적이고 보수적인 문제설정이다. 지은이는 이 둘 다 현실의 구조를 은폐하는 거짓된 문제설정이라고 본다. 대신 그는 왜 황씨에게 그토록 열광했던 한국인들이 순식간에 그토록 맹렬한 비난 대열을 형성하게 됐는지를 꼼꼼히 따진다. 저자는 황수정씨의 인기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집단적 소망의 산물”인 허준 드라마의 인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드라마 <허준>의 인기는 신자유주의의 정리해고와 성과급 연봉제, 그에 따른 빈부격차 심화와 같은 현실 자본주의의 공포에 직면한 사람들의 심리에 그 근원을 둔다. 사람들은 고된 노동의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고통스런 현실 대신 공동체적 가치와 정의가 살아 있는 <허준>이라는 로망스에 몰입했으며, 예진아씨 황수정은 “이같은 로망스의 대장정에서 한국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위해 장엄하게 바쳐진 전리품이었다”. “정의의 기사에 해당하는 허준을 거울 이미지로 인식했던 한국의 남성에게, 황수정은 이상적 파트너로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던 것”이며, “이 개인적 판타지가 깨어지자 공격성을 띠게” 됐다는 것이다. 예진아씨라는 판타지를 통해 한국인들은 가혹한 자본주의적 리얼리티의 생채기를 망각할 수 있었지만, 황수정 사건은 그 판타지가 단지 판타지일 뿐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 결과 사람들은 판타지에 가려졌던 고통스러운 상처를 다시 직시하도록 강요당하기에 이르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는 대신 집단적인 분풀이에 나서게 된다. 판타지의 붕괴를 지켜보는 대신 황수정 개인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격에 나서게 됐다는 분석이다. 보수주의와 음란성의 ‘동거’ 지은이는 이처럼 한국문화에서 현실을 은폐하는 음란한 판타지가 넘쳐나는 이유로 강고한 보수주의의 지배를 꼽는다. 한국처럼 보수주의가 절대적으로 주류를 차지하는 사회에서라면 현실의 모순은 필연적으로 억압되고 감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순된 현실에 대한 인식은 곧 현실의 변화에 대한 강력한 요구를 낳는다. 그러나 한국문화를 주도하는 것은 생래적으로 변화에 거부감이 클 수밖에 없는 보수주의다. 한국문화는 그러므로 ‘리얼리티’를 드러내기보다는 음란한 판타지의 ‘흥행’을 통해 이를 은폐하는 역할에 주력하게 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러한 ‘음란함’은 다시 역으로 한국의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확대재생산하게 된다. 이런 주장은 문화비평의 역할과 관련한 중요한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문화비평이 단지 판타지를 발생시키는 문화작품들의 내적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머물러선 안 되며, 그 판타지가 은폐하고 있는 현실의 리얼리티에 육박해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친구>와 같은 조폭 드라마를 볼 때에도 단지 조폭 드라마에 나타난 남성 중심의 가치관을 파헤치고 비판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러한 남성적 가치관이 갑작스레 중심화두로 제기되고 환영받게 된 사회적 조건과 지세를 드러내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 이택광씨는 현재 영국 셰필드대학 영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젊은 비평가이다. 비교적 고급의 논리를 담은 비평서이면서도 라캉과 프레드릭 제임슨 등의 이론을 설명하는 초반부를 빼면, 전반적으로 어렵지 않게 읽힌다. 그동안의 한국 문화비평에 무언가 빠진 듯 느껴왔던 이들에게 특히 가깝게 다가갈 만하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사진/<…음란한 판타지>는 문화생산물의 판타지가 은폐하는 현실의 리얼리티에 파고들어가야 한다며, 황수정 마약사적을 분석해 들어간다.
왜 한국문화가 음란하다는 것일까. 우리 문화가 그만큼 모순된 사회 현실을 은폐한 채 사람들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장치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음란한 판타지’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판타지란 현실 아닌 허구의 세계에 대한 상상이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허구의 세계로 도피하는 문화란 음란한 동시에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서서 이 책은 친일문학, 한류, 멜로드라마, 황수정 사건, 유승준 사건, 강준만 현상, 한국 축구의 의미 등 한국문화의 온갖 사건과 현상들을 짚어나간다. 저자가 보기에 문화비평의 역할은 곧 이런 사건과 현상들에 감춰진 ‘리얼리티’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황수정 사건은 우리의 실제 현실을 덮어버리는 한국사회의 지배적 문화담론들의 ‘음란함’을 벗겨내고 감춰진 ‘리얼리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예진아씨’ 황수정씨가 마약 투입 혐의로 구속된 사건을 두고 전개된 논리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공인으로서 지켜야 할 본분을 황씨가 저버렸다는 것이고, 하나는 범법사실은 인정하더라도 여성 연예인의 프라이버시와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논리 모두가 황수정 사건의 기저에 놓인 현실의 욕망구조를 드러내는 데는 실패했다고 저자는 질타한다. 두 번째 ‘프라이버시론’은 황수정씨가 청순가련형 이미지를 팔아서 지금의 인기구조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기에 현실적 설득력을 잃는다. 첫 번째 ‘공인론’은 황씨에게 쏟아진 엄청난 비난의 열기를 황씨 개인이 잘못했기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으로 도덕적이고 보수적인 문제설정이다. 지은이는 이 둘 다 현실의 구조를 은폐하는 거짓된 문제설정이라고 본다. 대신 그는 왜 황씨에게 그토록 열광했던 한국인들이 순식간에 그토록 맹렬한 비난 대열을 형성하게 됐는지를 꼼꼼히 따진다. 저자는 황수정씨의 인기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집단적 소망의 산물”인 허준 드라마의 인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드라마 <허준>의 인기는 신자유주의의 정리해고와 성과급 연봉제, 그에 따른 빈부격차 심화와 같은 현실 자본주의의 공포에 직면한 사람들의 심리에 그 근원을 둔다. 사람들은 고된 노동의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고통스런 현실 대신 공동체적 가치와 정의가 살아 있는 <허준>이라는 로망스에 몰입했으며, 예진아씨 황수정은 “이같은 로망스의 대장정에서 한국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위해 장엄하게 바쳐진 전리품이었다”. “정의의 기사에 해당하는 허준을 거울 이미지로 인식했던 한국의 남성에게, 황수정은 이상적 파트너로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던 것”이며, “이 개인적 판타지가 깨어지자 공격성을 띠게” 됐다는 것이다. 예진아씨라는 판타지를 통해 한국인들은 가혹한 자본주의적 리얼리티의 생채기를 망각할 수 있었지만, 황수정 사건은 그 판타지가 단지 판타지일 뿐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 결과 사람들은 판타지에 가려졌던 고통스러운 상처를 다시 직시하도록 강요당하기에 이르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는 대신 집단적인 분풀이에 나서게 된다. 판타지의 붕괴를 지켜보는 대신 황수정 개인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격에 나서게 됐다는 분석이다. 보수주의와 음란성의 ‘동거’ 지은이는 이처럼 한국문화에서 현실을 은폐하는 음란한 판타지가 넘쳐나는 이유로 강고한 보수주의의 지배를 꼽는다. 한국처럼 보수주의가 절대적으로 주류를 차지하는 사회에서라면 현실의 모순은 필연적으로 억압되고 감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순된 현실에 대한 인식은 곧 현실의 변화에 대한 강력한 요구를 낳는다. 그러나 한국문화를 주도하는 것은 생래적으로 변화에 거부감이 클 수밖에 없는 보수주의다. 한국문화는 그러므로 ‘리얼리티’를 드러내기보다는 음란한 판타지의 ‘흥행’을 통해 이를 은폐하는 역할에 주력하게 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러한 ‘음란함’은 다시 역으로 한국의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확대재생산하게 된다. 이런 주장은 문화비평의 역할과 관련한 중요한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문화비평이 단지 판타지를 발생시키는 문화작품들의 내적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머물러선 안 되며, 그 판타지가 은폐하고 있는 현실의 리얼리티에 육박해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친구>와 같은 조폭 드라마를 볼 때에도 단지 조폭 드라마에 나타난 남성 중심의 가치관을 파헤치고 비판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러한 남성적 가치관이 갑작스레 중심화두로 제기되고 환영받게 된 사회적 조건과 지세를 드러내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 이택광씨는 현재 영국 셰필드대학 영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젊은 비평가이다. 비교적 고급의 논리를 담은 비평서이면서도 라캉과 프레드릭 제임슨 등의 이론을 설명하는 초반부를 빼면, 전반적으로 어렵지 않게 읽힌다. 그동안의 한국 문화비평에 무언가 빠진 듯 느껴왔던 이들에게 특히 가깝게 다가갈 만하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