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불금’이었다. 7월26일 밤 9시, 서울 마포구 연남동 동진시장 골목길. 차 한 대도 들어가기 어려운 비좁은 그 길에 커피숍, 술집, 세탁소 등 작은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골목 안쪽 동네책방 ‘헬로인디북스’가 밤을 밝히고 있었다. 보통 때는 문 닫는 시간이지만 이날은 문을 열었다. 마지막 주 금요일 밤에만 하는 프로그램 ‘심야책방’을 여는 날이기 때문이다. 심야책방은 문화체육관광부가 ‘함께 읽는 2018 책의 해’를 맞아 시행하는 사업 중 하나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전국 책방 70곳에서 여는 행사다. 폐점 시간을 밤 11시까지로 연장하고 책방마다 특색을 살려 책 읽기와 연관된 문화 행사를 연다.
좋아하는 책 소개하며 ‘책 자랑’
8평 남짓한 작은 공간인 헬로인디북스는 책과 사람들로 꽉 찼다. 2013년 11월 문을 연 이곳은 국내 작가들의 독립출판물을 판다. 이날은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소개하는 ‘책 자랑’ 행사가 열렸다. 저마다 3~5권쯤 가져온 이들이 돌아가면서 책 이야기를 했다.
성광희씨가 책 <마녀체력>을 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 이 책에 나오는 ‘천천히 꾸준히 묵묵히 해라’는 구절이 좋아요. 항상 목표를 크게 잡아서 중도에 포기하는데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있는지를 곱씹게 했어요.”
신기한 보물을 본 것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책에 쏠렸다. 다른 참석자가 “저도 그 책 읽었어요”라며 반가운 공감의 말을 건넸다. 이때 책방과 마주 보고 자리잡은 술집에서 새어나온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유흥의 소리도 이들 이야기의 흐름을 깨지는 못했다. 책 자랑은 이어졌다.
정다정씨는 만화책 <유부녀가 간다>를 소개했다. “결혼했는데 아기가 없는 기혼자 이야기가 와닿았어요. 저도 그러니까요. 아이 없는 기혼자들은 다른 아이 있는 기혼자들 틈에 끼지도 못하고 미혼자와도 다르고. 그 애매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마음이 잘 표현돼 좋았어요.”
정씨는 심야책방에 세 번째 방문했다. 이 책방 단골이기도 하고 독립출판물을 만든 제작자이기도 하다. “저는 ‘불목’을 보내고 금요일 밤에는 조용히 제가 좋아하는 활동을 해요. 책을 좋아하니 책과 관련된 걸 하죠. 이렇게 심야책방에 오면 남들이 소개하는 책을 알게 돼요. 다시금 깨닫죠. ‘이 세상에 책은 많고 다양하구나’라고요.”
독립출판물이 좋아서 책방까지 차린 헬로인디북스의 이보람 대표는 책 자랑 프로그램 운영자이자 참가자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소개하는 것도 즐겁고, 몰랐던 새로운 책을 발견하는 것도 기쁘단다. “심야책방 모집 인원은 10명 정도예요. 모집 공고가 나가면 2~3일이면 정원이 차요. 금요일 밤인데도 많은 분이 신청해요. 한 번 참여한 분이 다시 신청하는 경우도 있고요.”
대형 서점에선 맛볼 수 없는 분위기
심야책방에 오는 사람들은 직업도 나이도 다르지만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로 이름도 나이도 말하지 않고 바로 자기 책 자랑으로 시작해요. 그런데도 모임에 처음 온 이들까지 금세 친해져요.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자랑할 데가 딱히 없었다고 하네요. 요즘 주변에 책 읽는 사람도 적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오면 책 좋아하는 이들만 있으니 책 자랑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즐겁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고요. (웃음)”
이 책방에 오는 이들은 20~30대가 가장 많다. 이보람 대표는 “홍대 부근인 연남동에는 젊은이가 많아요. 젊은 독립출판물 제작자들이 책을 만들어 팔고, 사는 사람들도 비슷한 또래입니다. 기성 출판물과는 결이 다른, 내 친구가 만든 것 같은 점을 좋아해 많이 사는 듯해요”라고 말했다. 이곳은 독립출판 제작자들의 사랑방 같은 책방으로도 유명하다. 창작자들을 위해 공간을 내주기도 한다. 책방 한쪽 벽면은 작은 삽화나 사진 등 작가들의 그림이 때마다 전시된다. 이들의 포스터와 엽서도 함께 판다.
독립출판물 <남김없이 시들고 나면> <우리가 사랑이라면>을 펴낸 북씨(필명) 작가도 이 책방 단골이다. 대형 서점에서 느낄 수 없는 동네책방의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어 이곳을 찾는단다. 자기가 펴낸 책을 책방에 들이려고 오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의 책을 만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 다른 창작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발견하는 책은 다음 창작의 마중물이 된다. “심야책방에 올 때마다 기분이 좋아요.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새로운 책을 찾아주는 것 같아요.”
심야책방에서는 예정에 없던 이벤트도 벌어졌다. 성광희씨가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 집과 사무실에 읽지 않고 쌓아두었던 새 책을 가져와 책 나눔을 했다. 필요한 사람에게 주려고 가져왔단다. 이날 참석한 이들은 모두 휘둥그레진 눈으로 책을 봤다. “저요! 저 그 책 갖고 싶어요.” “저는 디저트 책 주세요.” 책방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가져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책은 가장 갖고 싶은 선물이다. 책을 주는 이도, 받는 이도 웃음이 절로 피었다.
헬로인디북스의 심야 ‘책 자랑’ 프로그램에 참석한 사람들(왼쪽)과 그들이 가져온 책들. 허윤희 기자
지친 한 주를 책으로 마무리
이날 처음 심야책방에 참석한 박신영씨는 심야책방 모습을 상상해 그린 그림을 가져왔다.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줄 선물로 준비한 것이다. 그는 자기가 자랑하는 책 내용을 바탕으로 깜짝 퀴즈를 냈다. 그리고 정답을 맞힌 사람에게 그림을 선물했다.
“저에게 밤은 개인적인 시간이었어요. 밤에 주로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런데 밤에 이렇게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나누는 게 신기하고 특별한 일 같아요. 더 집중해서 듣게 돼요. 다른 인생을 산 사람들이라 저와 달라서 이야기가 낯설면서도 새롭고 재미있어요. 이야기를 들으며 작품 영감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책 <밤이 선생이다>에서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라고 했듯 박씨에게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란다. 박씨는 이날의 밤 풍경도 또 다른 작품 소재로 이어질 것 같단다.
직장인 유혜진씨도 심야책방에 처음 참석했다. 독립출판물을 좋아해 동네책방을 자주 찾지만 낮에 방문한 책방과 밤의 책방은 달랐다. 심야에 찾은 책방에서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집중해 들을 수 있단다. “야행성”이라는 그는 밤에 눈이 반짝반짝한단다. “대형 서점에 있는 기성 책과 달리 독립출판물은 정형화된 틀이 없어요. 모양, 크기도 제각각이고 내용도 다양해요. 저는 이런 자유로운 책이 술술 읽혀요. 나도 언젠가는 내 생각을 담은 책을 펴내고 싶고요.”
매달 열리는 심야책방에 빠짐없이 참석했다는 성광희씨는 퇴근 뒤 책방에 오는 게 즐겁단다. 책방은 그에게 힐링의 공간이다. “책방에서 만난 분들은 이해관계로 얽혀 있지 않아 편한 것 같아요. 오로지 책을 좋아한다는 점이 같잖아요. 그리고 다들 직업이 있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분이 많아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수공예품을 만들거나. 그렇게 좋아하는 걸 놓지 않고 하는 분들이 뿜어내는 밝은 기운이 있어요.” 성씨는 책 이야기를 하며 ‘불금’을 보낸 이런 날은 “오늘 하루 뿌듯하다”는 느낌이 든단다. 일하느라 지친 하루를 끝내는 시간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묵직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막차 시간이 돼서야 겨우 자리를 뜨고
책 수다가 길어질수록 밤은 더 깊어갔다. 책방은 도시에서 섬처럼 외따로 떨어진 이들이 책을 매개로 이어진 ‘취향 공동체’가 됐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소개한 책을 신기한 듯 읽고 서로의 책에 대해 말을 걸고 누군가는 책방에 있는 책을 둘러봤다. 다들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하철 막차 시간이 다가오는 이들이 하나둘 책방을 나섰다. 사람들 이야기를 품고 책을 안은 그들의 밤은 낮보다 아름다웠다.
여름 휴가철이지만 아직 휴가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면?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 밤으로 떠나는 야행 프로그램에 참여해보길 권한다. 여름밤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감성 여행이 될 테다. 8월에 고즈넉한 밤 풍경을 보며 역사 이야기를 하고 옥상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시골마을을 산책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밤빛 품은 성곽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2019 수원 문화재 야행(夜行)’이 8월9일부터 11일까지 사흘 동안 수원화성에서 열린다. ‘이야기가 있는 화성행궁’을 주제로 미디어아트와 행궁 야식 기행, 화성행궁 별 볼일 등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지등, 단청등, 진찬연등, 야행초롱 등 야행등 행사도 성곽 곳곳에서 펼쳐진다. 지역 예술인과 주민들이 참여하는 예술장터, 밤빛 마켓도 열린다.
#부산 산복도로에서 멋진 야경과 함께 영화를 보는 ‘산복도로 옥상달빛극장’이 문을 연다. 8월1일부터 9월8일까지 매일 저녁 8시 부산 서구 천마산 에코하우스에서 운영된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이번에 선보일 영화는 제36회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서 상영된 단편영화 <터치> <하루의 새해> 등이다. 부산독립영화협회가 추천하는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영화 감독들의 장·단편 영화를 비롯해 지역 대학생들이 제작한 단편영화 등 평소 만나기 어려운 영화도 볼 수 있다.
#경남 남해군은 가천 다랭이마을에서 자연의 소리를 함께 들으며 밤마실을 즐기는 ‘어쿠스틱 빌리지 달빛걷기’ 행사를 한다. 8월10일과 17일, 9월7일, 10월5일에 저녁 7시부터 밤 9시까지 열린다. 다랭이마을에는 우리나라 명승 제15호인 다랑논이 있다. 다랑논은 산간지역에 벼농사를 짓기 위해 산비탈을 층층이 깎아 만든 좁고 작은 논이다. 마을 문화재와 옛 농업 양식 등을 설명하는 마을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소원을 담은 풍등 날리기 체험도 할 수 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