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관련 집회에서 기자가 취재 내용을 적고 있다.
1. 새로운 현실 드러내기 레일라 슬리마니의 <섹스와 거짓말>은 귀엽고 자그마한 책이다. 대부분의 르포는 사회문제를 다룬 만큼 두툼하고 무겁지만 그녀의 책은 가벼웠다. 하지만 다른 르포처럼 사회적 편견을 헤치고 우리를 새로운 영역으로 데려다놓는다. 남녀가 혼인 외의 관계를 맺으면 길게 징역 1년형에 처해지고 동성애는 3년형에 처해지는 모로코에서 열악한 여성의 상황을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이 섹슈얼리티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뿐만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모든 관계가 엇갈리는 고밀도의 교차로’이다. 이런 억압이 ‘성적 빈곤’을 가져다준다. ‘성적 빈곤’이란 말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성적 빈곤은 사회적 빈곤과 긴밀히 연결됐으며, 단순히 물자와 자원이 부족한 ‘조건의 빈곤’이 아니라 ‘위치의 빈곤’이다. 그 모든 걸 견디며 모로코 여성들은 ‘세상 구경하기, 노래하기, 자기 의사를 표시하기’ 등 행동을 스스로 책임지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여성을 원한다. 2. 소설–코러스 2017년 서울국제문학포럼, 단상 의자에 앉아 있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조용히 ‘미래에 대한 회상’이라는 체르노빌에 관한 자신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이의 목소리는 사람들을 몰입시키는 단단한 힘이 있었다. “체르노빌 지대는 떠나는 즉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는 곳이었습니다. …마을 뒤편에 자리한 강은 평화롭게 흘러갔습니다. …너무도 사랑스럽고 친숙한 세상. 처음에는 모든 것이 예전처럼 제자리에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처에 공포와 알 수 없는 일들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목동들이 암소 떼를 몰고 물가에서 물을 먹이려 하면 암소들이 뒷걸음치며 물 마시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전쟁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은 전쟁이었습니다. 미래에서 온 전쟁. 미래에 인간이 겪게 될 공포였습니다.” 그이는 조곤조곤, 그러나 강렬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우리의 미래일 수 있어 더 소름이 돋았다. 알렉시예비치는 수백 명을 인터뷰해 소설처럼 읽히는 강렬한 매력이 있는 ‘다큐멘터리 산문’을 창조했다. ‘소설-코러스’라는 이 형식은 그이의 것만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벨라루스에는 이런 글쓰기 전통이 있었다.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시대를 다룬 다큐멘터리 소설 <나는 불타는 마을이다>는 알렉시예비치의 문학적 태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 책은 알레스 아다모비치, 얀 카브릴, 울라드 지미르, 카레스 닉의 공저였다. 그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면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테니까.” 이런 수많은 타인의 목소리가 우리 안으로 들어와 거대한 감정의 사원을 세운다. 아주 성스럽고 풍요롭게. 3. 타인에 대한 ‘상상’ 타인의 삶을 기록할 때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지 존 버거는 유럽 이민자들의 삶을 기록한 <제7의 인간>에서 사려 깊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책이 ‘꿈/악몽’에 관한 것이라 했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남들의 삶의 체험을 꿈/악몽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해서 악몽이란 이름도 너무 약한 것은 아닌가. 그들의 희망이 너무 높아서 꿈이라는 이름도 너무 약한 건 아닌가.” 그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어떤 세계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 모습을 해체해 다시 자기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행한 일정한 선택을 이해하려면, 그가 부닥쳤거나 거절당했던 다른 선택들의 결핍 상태를 상상 속에서 직시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잘 먹는 사람들은 못 먹는 사람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중심부에 놓인 사실들의 별자리 자체가 다른 것이기 때문에. 4. 기술 철학자 김진영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해석하면서 소설가인 베르고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베르고트는 말년에 항구에 있는 성당 처마 밑 벽면에 그려진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러 간다. 그는 거기서 노란색 벽면을 계속 덧칠한 부분을 보면서 그 세밀함, 공들임, 끊임없는 반복의 인내성, 아름다움에 대한 예술가들의 집념을 보았다. 베르고트는 자신이 신에게 뭔가를 바치기는 했는데 뭔가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아, 더 공들여서 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한탄하면서 그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예술가다운 죽음이긴 하지만 베르고트는 죽을 때까지도 베르메르의 그림 ‘델프트 항구’의 진실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오로지 기예, 테크닉에만 매달려 있었던 거다. 베르고트는 어떻게 보는지의 문제를 못 보고 오로지 어떻게 잘 그리는지의 문제만 집착한 채 죽음을 맞이한 거다. 혼다 가쓰이치는 <르포란 무엇인가>에서 르포작품을 쓰는 데 천재적인 문장가일 필요는 없으며 문장을 다룰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것도 90 이상이 훈련으로 숙달된다. 오랫동안 일해온 직장이라면 이미 취재가 끝난 것이며 문장으로 쓰는 일만 남았다. 그 글은 프로 르포작가가 쓰는 것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김민섭이 쓴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도 그런 경우다. 경험을 밀도 있게 그려내는 힘이 매우 인상 깊었다. 이후 김민섭은 시간강사직을 그만두고 대리운전을 하여 <대리사회>라는 르포집도 펴냈다. 일본 고단샤 논픽션상을 받은 <거리로 나온 넷우익>을 쓴 야스다 고이치는 자신이 상을 받은 게 문장을 잘 쓰고 취재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제가 주목받은 건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의 상은 끊임없는 사회현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로 얻어진 결과인 것이다. 5. 환상 르포가 다룰 수 있는 세계는 무한하다. 무엇을 다루느냐에 따라 그 세계도 달라진다. 심지어 환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도 가능하다. 라오웨이의 <저 낮은 중국>을 보면 마약중독자 시인 황허가 나온다. 그가 존재하는 세계에는 수많은 시어가 하늘을 날고 그 속을 시인은 걸어다닌다. “갑자기 엄청 많은 시구가 내 눈 안에 들어와! 그 시구들이 철로처럼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 갑자기 그 철로가 일어나기 시작했어. 땡그랑거리는 시구 속에서 난 그만 길을 잃고 말았어.”
세계의 르포 작가들. 왼쪽부터 귄터 발라프, 레일라 슬리마니,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라오웨이, 존 버거. AP 연합뉴스, 한겨레 김성광 기자, EPA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