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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오래된 악행을 말하다

4년째 이어진 ‘권리장전’ 연극축제… 올해 주제는 ‘원조적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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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20 10:44 수정 : 2019-06-2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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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장전 2019 원조적폐’ 축제 운영위원회 제공
‘권리장전 2019 원조적폐’가 6월5일부터 연우소극장에서 진행되고 있다. 축제는 4년째 지속됐다. 2016년의 답답하고 폐쇄적인 상황 속에서 벗어나려 알음알음 모여들었던 연극인들의, 하나의 자리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무력한 개인에서 탈출하려는 절박함이 그런 자리를 만든 제일 큰 동력이 아니었을까.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연극들

이양구 작가·연출가는 처음 모였을 때를 “아주 즐거웠던, 저항의 시작”이라 기억한다. 2015년부터 조금씩 드러난 국가의 예술가 검열 사태. 하지만 문제제기는 거듭 묵살당했고, 연극인 몇몇이 ‘연극 작품으로 길게 싸우자(長戰)’는 결심을 다져 축제를 만들었다. 자발적으로 많은 연극단체가 모여들어 첫해에 5개월 동안 멈추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그때 그 마음들은 연극인만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연극인들의 자유로운 발언은 이에 교감하는 사람들을 연우소극장에 찾아들게 했다. 해마다 축제를 방문한 어느 관객이 말했다. “당시 그런 자리들이 정말 필요했고, 속마음을 시원하게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권리장전은 그러한 사회의 욕구를 솔직하게 반영하는 자리로서 이에 교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4회를 이어왔다.

권리장전은 매해 주제를 갖고 치러졌다. 이는 비슷한 종류의 연극축제 ‘혜화동1번지 페스티벌’ 등도 마찬가지다. 축제 주제는 연극의 한 특성인 시의성을 강화한다. 특히 권리장전 참가작들처럼 사회적 주제 의식이 짙은 작품은 시의성이 매우 중요하고, 축제 쪽은 좀더 폭발적인 의미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2016년 권리장전의 주제였던 ‘검열각하’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았으며, 2017년 권리장전 ‘국가본색’은 2016년 주제를 좀더 심화한 접근으로 보인다. 2018년 주제 ‘분단국가’는 사회적 분위기와 특히 잘 맞아떨어졌다. 갑자기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남북통일의 사회적 의제와 맞물려 뜨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올해 주제는 ‘원조적폐’다.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관행과 잘못, 폐단 말하기. 김수희 예술감독은 “정치극 페스티벌이란 타이틀이 주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연극들”이라 소개한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축제에 참가한 양지모 연출가는 “연극을 통해 말하는, 권리장전의 솔직한 발언의 정신이 맘에 든다”며 “우리가 적폐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과연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고 생각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오래된 악행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사회의 근저에 오랫동안 있었던 만큼 그것을 말하는 이와 얕게 혹은 깊이 연루돼 있기 마련이어서, 말할 때 상처를 들쑤시는 것처럼 통증이 따를 수밖에 없다. 또한 혼란스럽고 불편함이 따라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가부장제의 뿌리 깊은 잘못을 말하는 작품이 나의 부모님과 이웃, 혹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 단언할 수 있겠는가.


첫 작품 <좀비가 된 사람들> 막 올라

사실 축제가 시작되기 전, 한편으로 적폐에 대해 말하는 행위가 오만하거나 공격적인 태도로 비칠까 염려했다. 하지만 올해 권리장전 첫 작품 <좀비가 된 사람들: Original>(손현규 연출, 창작집단 꼴)이 공연된 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오히려 ‘좀더 세게, 혹은 좀더 구체적으로’ 적폐를 말하는 것을 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은 언어가 규제되는 미래 사회를 가상했다. 관객은 현실 속 언론 문제와 연관해 상상력을 펼쳐나가거나, 좀더 다양한 상황을 자유롭게 떠올렸다.

축제 참가작 14편은 각 팀들이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적폐를 담고 있다. 언어와 소통 불능, 가부장제, 한국 근현대사, 무심한 말, 흔들리는 대중, 무력한 예술가, 여성 혐오, 빈부 갈등, 문제적 연극인 소환…. 작품들은 무지개처럼 팔색조의 다양한 적폐의 결을 펼쳐 보여준다. 김기춘과 유치진 등 아직은 말하기 불편한 실존 인물들을 데려와 적폐를 통한 발칙한 상상력을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을 적폐라 말하는지가 작품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소재 측면에만 몰두할 때 작품들을 빈약하게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무엇을 적폐라 보는지를 넘어 그것을 꼽은 이유와 어떻게 접근하는지가 작품을 만드는 결정적 요소다. 연극은 여러 사람이 논의해 만들어가는 팀 작업이며, 그것은 권리장전 참가작들처럼 사회와 현실을 해석하는 비중이 큰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나는 각 팀이 무엇을 적폐로 바라보는지보다 어떤 태도를 드러내는지가 더 궁금하다.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궁금하다. 얼마나 논의하고 함께 고민했는지가 작품에 나타날 때야말로 진짜 흥미롭고 재미있는 장면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이다.

각 팀의 접근 방법과 태도에 따라 다양한 말하기 방식이 가능하겠지만, 권리장전 참가작들은 소재의 특성상 풍자와 블랙 유머 등 희극적 색채가 전반적으로 강하지 않을까 예측된다. 이는 이전 권리장전 작품들에서도 느꼈던 점이다. 축제 참가작들의 희극성은 비판 정신을 강화하고 작품 주제를 더 깊이 있게 해주며, 결과적으로 의미와 담론을 활성화한다. 9월까지 열리는데 <우리 백사장의 식칼>(극장 시9), <춘의 게임: 나쁜 놈들의 대한민국 현대사>(친구네 옥상 ART), <진짜 진짜 마지막 황군>(공놀이 클럽) 등은 그 희극성을 충분히 기대하게 한다. 권리장전의 첫 작품 <좀비가 된 사람들: Original>은 희극 요소를 리듬감 넘치는 장면 연출로 연결했으며, 풍성하고 꽉 찬 장면들로 연우소극장의 한정된 공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했다. 작품은 벽면에 거울을 설치한 번쩍번쩍한 공간으로 전혀 달라진 연우소극장을 연출 했다.

인터넷 공간의 혐오와 여론 조작을 다룬 연극 <댓글부대> 공연 모습(왼쪽)과 ‘권리장전 2019 원조적폐’의 사전 워크숍인 ‘적폐투어’에 참여한 사람들. 극단 바바서커스 제공, 권리장전 축제 운영위원회 제공

젊은 예술가 선보이는 플랫폼

권리장전 축제가 4회를 이어오며, 자연스럽게 신생 단체나 젊은 예술가들이 작품을 선보이는 플랫폼 기능을 하는 점도 중요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길은 창작자들의 경험이 여러 경로로 쌓이는 것이다. 축제 플랫폼의 역할은 그 기회가 될 수 있다. <댓글부대>나 <어떤 접경지역에서는>처럼 권리장전 축제에서 등장한 작품들이 새로운 관객과 만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경험을 통해 작품과 창작자가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엄현희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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