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고래는 지구에서 가장 큰 생명체 대왕고래까지 잡아먹는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다. 20세기 중반 길들여져 범고래쇼에 이용된다. 미국 시월드 올랜도에서 공연하는 틸리쿰. 영화 <블랙피시>
여러 차례 공격 이후에야 직시한 실체 환경단체의 감시와 비판적인 여론으로 1972년 미국 정부가 자국 영해에서 고래 포획을 금지하는 해양포유류보호법(MMPA)을 제정하자, 시월드 등 수족관들은 아이슬란드 바다를 개척한다. 1976~88년 아이슬란드에서 48마리를 포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이슬란드에서도 야생 포획이 어려워지자, 시월드는 인공번식 기술 개발에 뛰어든다. 건강한 정자를 얻기 위해 시월드는 캐나다 시랜드에서 틸리쿰을 샀다. 시월드에서 틸리쿰은 공연에서 환호받는 ‘샤무 스타’가 아니라 번식 프로그램의 ‘정자은행’이었다. 무려 21마리 범고래의 아버지였다. 틸리쿰이 뿌린 씨로 말미암아 시월드는 반세기 만에 미국 샌디에이고·올랜도·샌안토니오와 아랍에미리트연방 아부다비에 공원을 가진 세계 최대 해양 테마파크로 컸다. 두 번째 사건이 터졌다. 1999년 7월6일 미국 시월드 올랜도에서 한 남성이 폐장된 뒤에도 몰래 수족관에 남았고, 이튿날 아침 그는 물에 뜬 주검으로 발견됐다. 틸리쿰은 주검 주변을 맴돌았고, 주검에는 물어뜯긴 자국이 가득했다. 2010년 2월24일 세 번째 죽음이 발생했다. 시월드 올랜도의 선임 조련사 돈 브랜쇼의 발을 낚아챈 틸리쿰은 그를 인형처럼 물고 풀장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그제야 틸리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살인 고래’는 무엇인가? 왜 그랬는가? 우리는 고래를 가두어도 되는가? 이후 틸리쿰은 일련의 사건을 촉발했다. 2013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블랙피시>가 방아쇠가 됐다. 범고래를 포함한 돌고래의 수족관 전시 공연을 반대하는 운동이 거세졌고, 대표 주자 시월드의 관람객이 급감하고 주가가 하락했다. 결국 시월드는 항복했다. 조엘 맨비 시월드 최고경영자(CEO)는 2016년 3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기고에서 “우리 테마파크에서 범고래를 본 사람들이 점점 더 범고래가 사람 손에 길러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면서 범고래 번식 중단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2013년에는 인도, 2015년엔 캐나다, 2017년 프랑스와 멕시코시티가 고래류의 전시 공연을 법적으로 금지하거나 비슷한 조처를 했다. 범고래 한 마리가 세상을 바꾸었다고 하면 허황된 이야기일까. 여기서 우리의 선입견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첫째, 동물을 수동적인 물체들의 집합체로 생각하는 경향이다. 성격을 가진 개개의 동물은 없고, 종의 일반적인 특성을 전부로 생각한다. 누군가 당신을 ‘두 발로 걷는 이 동물은 보통 가족·친구와 어울리는데, 가끔 혼자 있는 시간도 즐긴다’고 표현하면 그것으로 충분할까. 범고래도 마찬가지다. 틸리쿰이 일으킨 세 번의 ‘사고’는 틸리쿰의 유전자와 환경이 맞물려 만들어낸 틸리쿰 성향의 결과물이다. 둘째,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다. 인간이 동물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만, 면밀히 들여다보면 둘의 관계는 상호적이다. 인간에 의해 동물원에 갇혀 사는 동물일지라도, 그들의 몸짓과 눈빛은 사람들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틸리쿰의 일탈 혹은 저항도 사람들에게 거울을 들여다보게 했고 일련의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비좁은 수족관이 싫어서, 엄마가 그리워서 이쯤에서 이렇게 빈정대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틸리쿰에게 저항할 의도가 있었느냐고요? 그렇다면 고려시대 반란을 일으킨 노비 만적은 ‘근대 민주주의’를 알아서 봉기한 건가? 아니다. 틸리쿰은 비좁은 수족관이 참을 수 없어서 반란했다. 갑갑한 일상이 죽을 만큼 싫어서 반란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엄마가 생각나서 반란했다. 그리고 그것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람의 변화, 사회의 변화로 이어졌다. 런던(영국)=남종영 <애니멀피플>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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