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쑤저우에 있는 고서점 ‘문학산방’의 3대 계승자 왕청보 할아버지.
특히 중국에서 1960~70년대 문화대혁명(문혁)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강제로 몰수당한 채 모두가 예외 없이 ‘황당하고 미친’ 시대를 견뎌내야 했다.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죽어야만 했고, 어찌어찌 살아남은 사람들도 남겨진 상흔에 고통받으며 그 뒤로도 오랫동안 평범한 보통 사람의 인생을 살지 못했다. 문혁 시절, 모든 아이가 ‘커서 되고 싶은 사람’이 ‘마오 주석을 보위하는 계급 혁명전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은 ‘마오 주석의 혁명사상을 보위하는’ 홍위병이 되어 자신의 부모와 스승을 ‘계급의 적’으로 고발하거나 군중 속으로 끌어내 뺨을 때리고, 오물을 끼얹고, 머리를 깎았다. 문혁 중반기인 1970년, 장훙빙은 당시 16살이었다. 원래 이름은 장톄무였지만 1966년 문혁이 일어난 뒤 ‘마오 주석의 홍위병’으로 살겠다는 각오로 장훙빙으로 바꾸었다. 그는 자신의 친어머니를 ‘계급의 적’으로 고발했다. 어느 날 저녁, 집에서 가족과 식사하던 중 장훙빙의 어머니는 “지도자는 개인숭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류사오치 주석은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명예가 회복돼야 한다”는 등의 문혁 비판 발언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장훙빙과 그의 아버지는 곧바로 관계 당국에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를 ‘계급의 적’으로 고발했고, “현행 반혁명 분자인 어머니를 타도하고 즉각 총살해달라는 요청까지 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정말로 그의 어머니는 총살형을 당했다. 문혁이 끝나고,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장훙빙은 어른이 되었고 변호사라는 직업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과 문혁이 남긴 마음속 상흔은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살지 못하게 했다. 2011년, 59살이 된 장훙빙은 고향 마을 지방정부를 상대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자기 어머니의 묘를 문화재로 지정해달라는 소송이었다. 문화재로 지정해서 후세대에게 문혁의 비극을 기억하고 비판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그는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끝내 패소했다.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장훙빙은 이렇게 말했다. “영원히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통곡하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이렇게라도 해서 어머니에게 참회하고 싶었다.” 2013년 중국 언론에 보도된, 문혁 당시 어머니를 고발한 홍위병 장훙빙에 관한 이야기다. 문혁을 모르면 우리 세대 이해할 수 없어 “몇 살이냐고? 1926년에 태어났으니까 올해 94살이야. 자식들도 다 늙어서 은퇴하고 각자 자기 손주들을 돌보는 중늙은이이지. 같이 늙으니까 누가 아비고 자식인지 모르겠어, 허허! 여기는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쳐 내가 삼대째 이어 지키고 있어. 무수한 우여곡절이 있었지. 1956년 이후로는 문을 완전히 닫아야 했어. 온갖 정치운동의 광풍이 불면서 책방은 신화서점만 빼고 다 문을 닫았어. 지금 생각하면 참 이해가 안 되는 황당무계한 시대였지만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어. 94살인데 왜 이렇게 건강하냐고? 마음을 잘 다스려서 그래. 웬만해서는 절대로 화를 안 내. 문화대혁명이라고 들어봤어? 그걸 모르면 우리 세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문혁을 겪고 나서는 아무리 화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절대로 마음에 새겨두지 않아. 그 고통스러운 문혁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세상에 참지 못할 고통이 어디 있겠어? 류사오치라고 중국 국가주석까지 지냈던 위대한 사람도 문혁 때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는 줄 알아? 그래도 난 살아남았으니 그 사람에 비하면 덜 불행한 셈이지. 무수한 정치운동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은, 그래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는 거야. 살아남았으니 이렇게 좋은 세상도 구경하지. 자서전을 써보라고? 허허, 나 같은 사람이 중국에는 쌔고 쌨어. 무슨 특별한 이야깃거리도 안 돼. 그리고 그런 소리는 중국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야! 언제 또 세상이 뒤집어져서 마오 주석 시절로 돌아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 많은 운동이란 운동을 다 거치면서 내린 결론은, 죽을 때까지 입조심해야 한다는 거야. 언제 어느 때 또 꼬투리를 잡힐지 모르거든. 내가 왜 그걸 모르겠어. 94살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쑤저우에서 만난 올해 94살의 왕청보 할아버지는 “삶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문혁보다 더 참기 힘든 고통은 없다”고 했다. 왕 할아버지는 쑤저우 핑장루 역사문화거리 근처에 있는 뉴자샹이라는 한적한 골목길에서 고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문학산방’(文學山房)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서점의 역사는 무려 100년이 넘었다. 중국 청나라 광서제 때인 1899년, 왕청보 할어버지의 조부가 쑤저우의 한 골목길에 이 고서점 문을 열었고, 그 뒤를 왕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이었다. 창업자인 조부와 아버지의 노력으로 서점은 1930년대 중화민국 시기에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중국 전역의 장서가들 사이에 가장 유명한 고서점으로 통했다. 왕청보 할아버지는 조부와 아버지를 따라서, 17살 무렵인 1942년 문학산방의 견습생이 되었다. 그리고 조부와 아버지로부터 고서적 수집과 복원 작업 등 고서적 분야 지식을 배워 일찌감치 문학산방의 3대 계승자가 되었다.
중국 청나라 광서제 때인 1899년 문을 연 ‘문학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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