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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축구 약소국이 서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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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3-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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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읽기 4ㅣ 비운의 스타

국제적 명성에도 월드컵에 불참하는 선수들… 누가 허영심 충족의 접대부 노릇을 강요하나

사진/ "아프리카에서 진실을 말하면 반역자가 된다." 조지 웨어는 라이베리아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겨레)
10년 넘게 내전이 이어지고 다수 인민은 기아에 허덕이는 땅. 난리통에 대학의 95%가 붕괴하여 교수들은 국외로 탈출하고 학생이라곤 고작 5천명밖에 남지 않은 나라. 이 암울한 나라에 걸출한 축구선수가 나타난다. 조국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겠다고 어금니를 악다문 그는 대표팀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자기 돈으로 선수들에게 유니폼을 사 입히고 감독까지 겸하며 팀을 월드컵 예선에 참여시킨다. 그러나 본선 진출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사람들은 되레 그를 역적으로 몬다. 상심하여 도중에 팀을 떠나는 그. 그러자 평소 적대적이던 대통령까지 나서서 만류하고, 마침내 그는 팀에 돌아와 최후의 결전에 임한다.

축구 망명객 위기에 몰린 조지 웨아


영화 속 이야기인가? 아니다.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라이베리아의 ‘킹 조지’. 1995년 국제축구연맹(FIFA)에 의해 세계 제일의 선수로 선정된 조지 웨아가 이번 월드컵을 앞두고 겪은 일이다. 하긴 이 이야기는 착한 마음씨를 지닌 비범한 인물의 출현, 대중의 열광과 변덕 사이에서 그가 봉착하는 딜레마, 그리고 극적인 반전이라는 요소들 덕분에 묵직한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영화에서와 같은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사람은 이 이야기의 침통한 결말에 적이 실망할 것이다. ‘외로운 별’이라는 애칭의 라이베리아 대표팀은 결국 ‘검은 독수리’ 나이지리아에 승점 1점이 뒤져 탈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난 1월 말, 웨아는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다. 서른을 훨씬 넘긴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대중적 인기를 시기해온 대통령에 의한 신변의 위협 탓이었다. 실제로 집이 불타는가 하면 그가 소유한 상점도 약탈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독재정권이 바뀔 때까지 조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면서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긴다. “아프리카에서 진실을 말하면 곧 반역자가 된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축구 망명객이 될 참이다.

순전히 구경꾼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로써 이번 월드컵 무대에서 ‘실물’을 못 보는 세계적 스타가 한 사람 더 늘어난 셈이다. 국제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이번 월드컵에 불참하는 선수들은 뜻밖에 많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조지 웨아처럼 축구 약소국에 태어난 까닭에 아마 영영 월드컵에 나오지 못할 선수들이다. 핀란드의 야리 리트마넨, 웨일즈의 라이언 긱스, 시에라리온 출신으로 인터밀란에서 뛰고 있는 모하메드 칼론(웨아가 아들처럼 아낀다는), 트리니다드토바고의 드와이트 요크 등이 그들이다. 특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천재적인 왼쪽 날개 라이언 긱스를 못 보게 되어 서운한 팬들은 나말고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 나라의 영웅이 된 그들더러 월드컵에서 한번 볼 작정으로 국적을 바꾸라고 떼를 쓸 수는 없다. 또 본선에 떨어진 나라 선수들만으로 한 팀을 꾸려 참가시키는 제도를 만들자고 한다면 FIFA는 무모한 제안이라며 일축할 것이다. 하지만 무모하기로 따지면 조국의 이름으로, 혹은 팬의 ‘순수한’ 애정을 방패삼아 축구와 선수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우는 일보다 더할 리는 없다.

16강 진출 염원은 정녕 정당한가

조지 웨아의 비극은 가장 선명한 사례이지만, 요즘 누구나 입만 열면 16강 진출을 외치는 우리 한국인들도 그런 위험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사회 모든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문제는 바닥을 겸허하고 묵묵히 다지는 일 대신 가시적이고 일회적인 성과에 매달리는 태도이다. 그런 태도가 이어진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기대를 현실과 바꿔치기하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못 벗어날 테고, 축구는 우리의 허영심 충족을 위해 매번 애꿎게 불려나오는 접대부 노릇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말할 나위 없이 이때 실종되는 것은 축구 자체가 안겨주는 즐거움이고 선수들의 땀 한 방울에 담긴 고독한 노동의 의미이다.

손경목/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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