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제공
이 영화에서 스윈턴은 무용단의 수석 안무가 마담 블랑, 남성 정신분석학자 클렘페러 박사 그리고 영화 후반부 하이라이트에 얼굴을 드러내는 무용단의 창립자 헬레나 마르코스까지 무려 1인 3역을 연기한다. 특히 클렘페러 박사 역은 가상의 남성 배우 이름을 만들어서 비밀에 부쳤을 정도로 반전의 캐스팅이었고, 사실 영화를 보면서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이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84살 노부인 마담 D를 연기했던 경험이 있지만, 이번엔 얼굴과 몸의 특수분장뿐 아니라 다리 사이에 특수 제작한 가짜 성기를 차고 남성인 클렘페러 박사를 연기했다. 또한 단순히 분장의 힘을 넘어 집요한 학자의 날카로움 속에 여든이 넘은 노인의 느린 움직임과 평생 몸에 밴 남성적 태도까지 구현해내며 예술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새로운 성취를 일구어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초자아, 자아, 이드(프로이트가 정의한 인간 심리의 세 가지 요소)를 동시에 연기할 배우는 틸다 스윈턴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실로 영화는 마담 블랑의 클로즈업 다음에 바로 클렘페러 박사의 클로즈업을 배치하고, 마담 블랑의 목소리에 클렘페러 박사의 목소리를 이어 붙이고, 심지어 한 공간에 3명의 캐릭터가 동시에 존재하게 하는 등 과감한 편집과 연출로 한 배우가 연기하는 다중의 캐릭터에 대한 의심에 정면승부로 응답한다. 여자이기도 남자이기도, 신이기도 마녀이기도, 어제를 살기도 오늘을 살기도 하는 존재는 누구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같은 이 질문에 부합하는 배우는 단연 틸다 스윈턴이다. 스윈턴은 1960년 지구에 태어난 여성으로 살아가지만, 단순히 ‘중년 인간 여성’이라는 구분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영화 <올란도>(1992)는 “그의 성별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라는 내레이션으로 문을 연다. 그리고 영화의 카메라는 17세기 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미소년의 모습으로 응시하는 스윈턴의 얼굴을 탐미적으로 바라본다. 400년에 걸쳐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모하며 초월적인 삶을 살았던 ‘올란도’는 스윈턴을 기억하는 대표적인 캐릭터가 된 동시에, “변하지 말고, 병들지 말고, 늙지도 말아야 한다”는 <올란도> 속 엘리자베스 1세의 대사는 스윈턴에게 지금까지도 유효한 주문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화는 함께 만드는 사람들과 관계에서 성장”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에서 뱀파이어 커플을 연기한 배우 톰 히들스턴과는 무려 21살 차이가 나지만 두 사람은 어떤 위화감도 없이 어우러진다. 바이런과 슈베르트, 셰익스피어와 친구 하며 몇 세기를 거쳐 살아온 뱀파이어의 생을 생각하면 어제와 오늘 정도의 차이다. 틸다 스윈턴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고 스코틀랜드 혈통에 현재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살고 있지만, 그의 이름 앞에 ‘영국 배우’ ‘스코틀랜드 배우’라고 특정 국가, 인종, 지역 코드를 달기엔 어쩐지 충분치 않다. <아이 엠 러브>(2009)에서는 이탈리아에 사는 러시아 출신 여성의 악센트를 쓰고, <서스페리아>에서는 독일어와 프랑스어, 심지어 광고에서는 떡볶이를 먹으며 한국어로 소통하려고 애쓴다. <콘스탄틴>(2005)의 천사 가브리엘,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2005~2010)의 하얀 마녀,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의 뱀파이어처럼 아예 인간 세계의 구분을 뛰어넘는 존재도 많다. <닥터 스트레인지>(2016)의 스승 ‘에이션트 원’은 원작 만화에서는 티베트 남성 노승이었다. 이 캐릭터를 백인 여성인 스윈턴이 맡았을 때는 잠시 ‘화이트 워싱’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스윈턴은 영화 속 에이션트 원을 인간 세계의 모든 구분을 초월하는 새로운 캐릭터로 재창조해버렸다. 영국 상류층에서 자라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했고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에서 무대생활을 시작했지만 <아이 엠 러브>에서 명품 옷을 입은 이탈리아 대부호의 며느리는 스윈턴의 캐릭터 선택에서 이례적인 경우다. 스윈턴의 영화적 페르소나(인격)는 성별과 인종, 나이, 국적, 뿌리, 계층, 교육 수준 그리고 시대와 차원까지 국경 없이 경계 없이 자유롭게 넘나든다.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더그 에이킨과 한 인터뷰(18명의 예술인에게 창조성의 근원을 묻는 2012년 영국 전시관 ‘테이트 리버풀’의 전시 작품 ‘소스’(Source))에서 스윈턴은 자신을 계속해서 배우로 살게 하는 힘의 근원을 “과연 정체성이란 것이 정말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심”과 “정체성에 대한 사회의 강박관념에 대한 관심”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함께 만드는 사람들과 관계에서 성장한다”고 믿는 스윈턴은 데뷔작 <카라바지오>(1986)부터 <대영제국의 몰락>(1987) 등 총 8편의 영화를 함께했던 급진파 예술가 데릭 저먼을 비롯해서 짐 자머시, 웨스 앤더슨, 테리 길리엄, 코엔 형제, 린 램지, 루카 구아다니노 그리고 봉준호까지 ‘작가 감독’들을 강력하게 자극하는 ‘작가 배우’다. 그 동료들에 대한 틸다 스윈턴의 인터뷰를 유심히 살펴보면 유독 “쌍둥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설국열차> <옥자>를 함께한 봉준호 감독에 대해서는 “나와 전생에 쌍둥이가 아니었을까”라며 그와의 친밀감과 동질감을 표현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존 버거의 사계>(2016)에서 동료로 친구로 우정을 쌓은 작가 존 버거에 대해서는 ‘정신적 쌍둥이’라고 말한다.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자체의 형상” 실제 존 버거와 틸다 스윈턴은 1926년과 1960년, 34년 간격으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저항의 상징인 ‘가이 포크스 데이’(11월5일)가 생일이라는 태생적 저항성과 규율과 명령으로 다져진 군인의 자녀라는 정서적 공감대까지 나누었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정체성에 가둬지지 않는 스윈턴의 얼굴은 존 버거의 말대로 어느덧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자체의 형상을 띠게” 되었다. 그렇게 쌍둥이 같은 동료들과 손잡고 누구와도 닮지 않았지만 자신과는 똑 닮은 페르소나들을 하나둘 세상으로 내보내는 중이다. 가끔은 <옥자>나 <헤일, 시저!>처럼 두 명을 동시에, <서스페리아>처럼 세쌍둥이를 한 번에 생산하기도 한다. 우연히도 필연적으로, 스윈턴은 실제 삶에서도 남녀 이란성쌍둥이의 엄마다.
이 배우의 비트
영화 <설국열차>,
메이슨 총리의 틀니 결정적 한 방
영화 <설국열차>, CJ E&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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