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밧줄을 잡아준 이는 빵집 주인 위로는 달걀프라이다. <슬픔의 위안> 저자들은 상실에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밧줄에 매달린 상태라고 썼다. 그 반대편 줄을 단단히 잡고 있는 사람이 가장 가까운 이일 필요는 없다. 사소한 것이라도 믿을 수 있으면 된다. ‘네가 정신 나가 있어도 나는 네가 배고플 때 최소한 달걀프라이를 해주겠다’라는 약속이다. 새벽에 받아주는 전화다. 눈이 퀭한 친구를 달고 장보기다. 그런 신뢰 덕에 나는 아직 ‘안전하다’는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잘될 거야.” “너는 괜찮을 거야.” 말하는 사람 자신도 온전히 믿지 못할 말은 공허하다. “편안함(comfort)이란 말은 ‘아늑하다’거나 ‘쾌적하다’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성채에서처럼 ‘튼튼한’을 의미하는 ‘fortis’가 어원이다. 편안하다는 것은 성채 안에 있는 것처럼 안심이 된다는 뜻이다.”(<슬픔의 위안>) 그 달걀프라이는 내게 성채였다. 노른자는 터졌지만.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에 실린 단편 ‘별것 아닌 거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는 그런 밧줄을 쥔 낯선 이가 나온다. 스코티는 월요일이면 여덟 살 생일을 맞는다. 엄마는 그 전에 쇼핑몰에 있는 빵집에서 스코티만을 위한 케이크를 주문했다. 중년의 빵집 주인은 퉁명스러웠다. 월요일 오후, 스코티는 여느 때와 똑같이 학교에서 집으로 향했다. 가벼운 교통사고였다. 스코티는 넘어졌다 일어나 집까지 왔다. 그러고는 정신을 잃었다. 처음에 의사는 가벼운 뇌진탕이라고 했다. 스코티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돌아가며 아이 곁을 지켰다. 집으로 자꾸 전화가 왔다. “스코티는 잊어버리셨나요?” 아이는 수요일에 숨졌다. 의사의 말을 듣고 아빠는 말했다. “나는 이해 못해요. 이해 못해요. 절대로 이해 못해요.” 또 집으로 전화가 왔다. “스코티는 잊어버리셨나요?” 빵집 주인 목소리다. 부모는 머리 천장까지 화가 났다. 누구에게 향하는 화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단은 빵집 주인이다. 빵집으로 쳐들어갔다. 사실 빵집 주인은 잘못한 게 없다. 스코티가 그렇게 된 줄 몰랐다. 케이크를 가져가라고 전화한 것뿐이다. 사정을 들은 그는 말한다. “나는 아이가 없기 때문에 지금 당신들의 심정을 간신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미안하다는 것뿐입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빵집 주인은 오븐에서 막 구운 계피롤빵을 내왔다. 커피를 내렸다. 엄마는 달콤한 롤빵을 먹었다. 스코티의 부모와 빵집 주인은 자정부터 해가 뜨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기억은 냄새를 타고 온다. 친구 집에서 온갖 민폐를 끼친 게 3년 전이다. 죽음을 연구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말기 환자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눴다.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이다. 상실을 소화해가는 단계이기도 하다는데 이 순서로 오지도 않고 또 모두 다 거친다고 끝도 아니다. 익숙한 냄새가 슬쩍 코끝을 스치기만 해도 그 모든 단계가 되살아나곤 한다. 그러면 또 전화통을 붙들고 돌림노래를 한다. 친구는 전화기 저편에서 듣고 있다. 여전히 밧줄을 잡고 있다. 내 슬픔도, 네 슬픔도 대하드라마 상실에도 제각각 무게가 있다. 내가 짊어진 건 봄 소풍 봇짐 정도라면 친구는 벽돌 더미를 지고 있다. 지난해 가을 친구는 어머니를 잃었다. 장례식에서 나도 같이 울었다. 친구의 겨울이 어땠는지 나는 잘 모른다. 자기 슬픔은 대하드라마인데 남의 슬픔은 단막극인 줄 안다. 통화가 끝나고 한참 뒤에야 후회가 몰려왔다. 밥해줄걸.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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