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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람은… 그것밖에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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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3-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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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적인 인간’의 환상을 조롱하는 홍상수 감독의 신작 <생활의 발견>

어떤 사람의 독특한 몸짓에서 그 사람의 성격을 읽으려 할 때가 많다. 이건 오류를 낳기 쉽다.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사람 몸짓의 수는 지금까지 지구에 태어난 인간의 수에 비해 훨씬 적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쿤데라는 “어떤 몸짓이 그 사람의 정수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그 몸짓의 정수를 잘 표현했다고 말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그의 소설 <불멸>에서는, 등 뒤에 있는 사람에게 살짝 몸을 돌려 한쪽 손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주인공의 몸짓이 주변 인물들에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전이돼 간다.

예리한 시선으로 채집한 디테일

사진/ 영화 [생활의 발견].
한 개인을 남과 구별짓게 하는 그만의 독자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게 뭘까. 아니,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홍상수 감독의 최근 영화들은 개인의 행동과 사고에 독자성과 독창성이 있다고 믿는 ‘환상’에 시비를 건다. 신작 <생활의 발견>(22일 개봉)에서 주인공 경수(김상경)는 저도 모르게 남의 말을 따라 하고, 술먹을 때 몸을 좌우로 흔드는 습관도 남에게서 배운다. 여기까지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지만 연애할 때 자기 감정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방법도 남을 따라 한다. 일주일 간의 여행 도중 춘천에서 처음 만나 함께 잔 명숙(예지원)이 다짜고짜 자기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황당하게 여겼으면서도, 그 며칠 뒤 경주에서 선영(추상미)을 처음 만나 몸을 섞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런 경수의 태도는 명숙보다도 진지해 보이지 않지만, 사랑한다는 자기 말에 스스로 빠져들면서 선영에게 달려든다.


자기 판단과 행동에서 독자성을 결여한 경수의 멍청함은 자못 심각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다수 사람들이 이런 멍청함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홍 감독의 전작 <오! 수정>은 자기 기억이 객관적 사실과 일치할 것으로 여기는 대다수 사람들의 믿음을 가볍게 조롱했다. 두 영화의 시선을 한데 섞어 개인을 바라보면 그는 남을 따라 행동하고(그것도 남녀간의 연애까지), 그 뒤엔 그걸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해 왜곡한 기억을 데이터로 간직한다. 그래 놓고는 정확한 기억을 토대로 합리적인 길을 선택해 주체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실은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홍 감독은 자꾸만 지적한다. 예리한 시선으로 채집한 많은 디테일들의 개연성이 그 지적에 설득력을 더한다. 하지만 가뜩이나 갑갑한 세상에서 희망과 가능성을 찾고 싶어 목이 타는데, 사람들이 그것밖에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홍 감독은 자기 취향과 작품관과 세계관 사이에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는, 그리 흔치 않은 영화작가다. 영화 안에 의미를 집어넣는 걸 싫어하지만 그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의 영화가 사회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꼼꼼히 따져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연을 믿는다, 욕망을 믿는다

사진/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생활의 발견]은 개인의 행동과 사고에 독자성과 독창성이 있다고 믿는 '환상'에 시비를 건다.
“사람들은 자기 행동의 독창성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도덕적인 건지 몰라도, 그 환상을 건드리면 사람들이 좀더 겸손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홍 감독에게는 사람들이 환상을 깨고 좀더 소박하게 자기 주변을 돌아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재작년 <오! 수정>이 개봉된 뒤 그를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막연하게 자기 생겨먹은 것과 다르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방해를 하는지, 눈을 멀게 하는지 순수한 진정성 등등 행복을 얻기 위해 필요로 하는 최소 조건을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굉장히 부족한 상태에서 살다가 어느 날 죽는다.… 지금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것이고, 지금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것이다. 행복은 따질 수도,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왔다갔다 하다가 끝나는 것이다. 각자가 처한 요소와 상황, 그것을 소박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을 인정함으로써 조금씩 편해지고 자유로워지고 자기 식으로 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홍 감독이 이번 영화의 제목을, 내용과 전혀 관계없이 <생활의 발견>이라고 붙인 게 이해가 간다. 그는 같은 제목의 린위탕(임어당)의 책을 몇 페이지 읽다 말았지만, 제목은 직감적으로 그에게 와 닿았다. “내 영화 작업이 생활의 발견 같다.” 하지만 강령이나 캠페인, 메시지 같은 건 아무래도 그에게 거북하고 거대담론은 그의 영화에 발붙일 자리가 없는 것 같다.

“사회적인 문제의식은 사회를 개선시켜 수용자들로 하여금 그 덕을 보게 할 수 있지만, 그것만 해결되면 우리가 행복해진다고 하는 과장법이 자주 따라붙는다. 한 사람의 실존이 행복해지는 데는 그 사람이 관여하고 있는 부분말고도 수없이 많은 부분이 필요하다. 그것만 해결되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 사이에 자기 실존이 허해질 수 있다.” 홍 감독은 영웅사관을 싫어한다. “역사는 소수의 의지나 의식으로 바뀌는 게 아니지 않냐”는 말을 자주 한다. 그는 역사든 개인이든 의지를 믿지 않는다. “의지 대신 욕망을 믿는다. 욕망과 운으로 설명하면 명쾌한데, 의지와 게으름으로 설명하면 억지스러워진다. 우연은 믿는다.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믿는다.”

의지 대신 욕망과 우연을 믿는다는 말은 그의 세계관과 작품관을 연결짓는 고리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인간들의 표리부동하고 자기 모순적인 행동 속에서 수컷과 암컷의 성적인 본능을 잡아내는 건 홍 감독의 특장이다. 하지만 그 본능으로 설명되지 않는 우연적인 부분이 있다. 그의 영화에는 한 인물이 목표한 다음 행동을 하는 사이에 인과관계가 잘 설명되지 않는 엉뚱한 동작을 하거나, 전체 문맥과 별 상관이 없는 사소한 사건이 끼어드는 경우가 잦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는 선영과 술 마시던 중 바람 쐬러 나가다가 컵을 깨 그 조각을 일일이 주워담는 장면이 꽤 길게 나온다. “조그만 행동도 목적한 인과율에 따라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컵조각을 담는 모습도 내 영화에서는 내러티브다.…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게 많은데 그게 너무 커서 되레 안다고 믿는다. 알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해서 말할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

의미화, 단순화된 왜곡

사진/ 홍 감독은 "의지와 의식 대신 욕망과 우연을 믿는다"고 말한다.
당연히 홍 감독은 영화를 구상할 때 주제나 소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사람 만나고 세상을 관찰하면서 채집한 이런저런 디테일들을 모아본다. 그게 동그랗게 모여지면서 어떤 패턴을 형성하는 게 보이면 그때 시작한다. “살아가는 걸 그리는 데는 디테일뿐 아니라 그 디테일들이 어떻게 모아지느냐 하는 패턴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장르나 희비극 따위의 분류도 다 그 패턴에 대한 것이다. 나는 기존의 패턴이 아닌, 다른 걸 가지고 디테일을 모아보는 데 관심이 많다.… 의미화라는 것은 적나라하게 얘기하자면 부족하고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왜곡이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만드는 이나 보는 이나 피할 수 없지만, 너무 거기에 집착하면 12각 정도 돼야 하는 얼굴이 3각이 돼버리고 만다.”

세상이 갑갑해서 출구를 찾고 싶지만, 쉽게 찾은 답일수록 틀린 답이 되기 쉽다. 강령이나 캠페인은 많지만 딱히 손에 잡히지 않고, 2각 내지 3각으로 세상을 보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많다. 홍상수의 영화는 우리가 간과하고 지나가는 것들을 다시 보도록 독촉한다. 그 대상이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반대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임범 기자/<한겨레> 문화부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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