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왼쪽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스타워즈> <슈팅 라이크 베컴> <어톤먼트> <비긴 어게인>. 각 영화사 제공
“딸에게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안 보여줄래요” <스타워즈: 에피소드1-보이지 않는 위험>(1999)에서 키라 나이틀리는 내털리 포트먼이 연기한 아미달라 여왕의 시녀로 등장한다. 여왕을 지키기 위해 그녀처럼 꾸민 대역이었다. “분장하고 나면 부모님도 못 알아볼 정도로” 유사한 이목구비 덕이었다. 이 영화로 12살 영국 소녀는 안전하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장에 합류했지만 돌이켜보면 이 역할은 마치 전쟁의 서막처럼 느껴진다. <비긴 어게인>에서 자신이 생일 선물로 준 곡으로 히트곡을 만든 얄미운 전 남자친구처럼, 나이틀리의 필모그래피 속 페르소나(인격)들은 늘 재능과 정체성을 뺏으려는 자들, 얼굴과 이름을 지우려는 자들과 치른 치열한 전투의 기록이었으니까. <콜레트>에서 나이틀리가 연기하는 ‘콜레트’는 예술적 재능이 넘쳐나는 여성이다. 하지만 자신이 쓴 자전적 소설 ‘클로딘’ 시리즈를 남편 이름으로 출판하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 100년 전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연상의 남자와 결혼한 당시 여성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희생이자 내조였다. “내 이름은 클로딘, 나는 몬티니에 산다. 나는 1884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곳에서 죽지는 않으리라.” 타고난 환경에 발목 잡히지 않고 삶과 죽음의 터전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소녀 클로딘의 이야기를 읽은 뒤, 많은 프랑스의 여성 독자들은 “클로딘은 바로 나 자신이에요”라며 지지를 보낸다. 콜레트는 더 이상 그림자 속 삶을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결국 남편에게 잠시 양도했던 목소리를 되찾고, 시대가 지웠던 자신의 이름을 책 표지에 새겨넣는다. 동시대 여성들의 롤모델이자 모두가 사랑한 셀러브리티 그리고 20세기 아이콘이 되었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영화 속 콜레트가 소설 속 클로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소녀 시절을 기술했다면, 배우 키라 나이틀리는 영화 속 콜레트의 목소리를 빌려 현대 여성들에게 “당신의 잃어버린 이름을 찾으라”고 웅변한다. 지난해 10월 미국 NBC <엘렌 쇼>에 출연한 나이틀리는 3살 반이 된 딸에게 특정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여주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신데렐라>는 부자 남자가 자신을 구해주길 기다리는 이야기잖아요. 안 돼요. 스스로를 직접 구해야죠. 물론 <인어공주>의 노래들은 너무 좋아하지만, 당신의 목소리를 남자를 위해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나이틀리를 찾아온 혹은 이 배우가 선택한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시대에 불시착한 여성들이었다. 축구에 빠진 영국 소녀, 해적이 된 상류층 여성, 결혼 시장의 적당한 상품이 되길 거부하는 가난한 집 둘째 딸, 낮은 신분의 남자에게 욕망과 사랑을 먼저 고백하는 <어톤먼트>의 세실리아, 타인의 시선에 결박당하지 않은 채 사랑에 모든 걸 걸었던 <안나 카레니나>, 여성의 뇌를 믿지 않던 보수적 시대에 지성의 진짜 존재 이유를 알려준 <이미테이션 게임>(2014)의 조안 클라크까지.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어떤 시대에서건 내부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욕망을 숨기지 않고, 그 선택에 따른 대가 역시 징벌이든 죽음이든 도망치지 않고 기꺼이 감내한다. 시대에 불시착한 여성들 욕망을 숨기지 않는 여성 캐릭터가 특정 배우를 계속해서 찾아가는 것은 단지 우연일까. “그동안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자주 출연하지 않는 건 항상 여성이 그려지는 방식에서 뭔가 불쾌함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여성 캐릭터들은 언제나 거의 강간을 당하더라고요. 반면 시대극에서 나에게 영감을 주는 캐릭터를 제안받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조금씩 개선되고 있음을 느껴요. 갑자기 저에게 처음 5페이지에 강간당하지 않는 시나리오, 단순히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나 부인이 아닌 현대물의 여성 캐릭터가 들어오기 시작했거든요.”(<버라이어티> 2018년 인터뷰 중) 그렇게 배우의 흔들림 없는 선택과 함께 정체된 서사는 조금씩 수정되고, 세상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중세의 드라마, 근대의 사회극, 현대의 뮤지컬, 미래의 공상과학(SF) 영화, 무엇이든 간에 지난 시대의 낡고 부당한 관습을 깨는 여성들은 계속 배우 키라 나이틀리를 찾아갈 것이다. 영화의 어느 골목을 돌 때 나이틀리의 멋진 턱이 보인다면 잠시 속도를 늦추시길, 그리고 험난하지만 아름다운 그 길을 빠짐없이 여행하시길. *연재를 시작하며 탐험(探險)이란 “미지의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 및 성과에의 기대가 결부되어 야기된 인간의 행위”(두산백과사전)라고 정의된다. 지난 20년간 영화기자로 일하며, 특히 배우에 대한 글을 쓰고 인터뷰하는 것을 천직으로 삼게 되었지만, 나에게 배우들은 여전히 미지의 존재다. 한 편의 영화를 둘러싼 다양하고 구체적인 분석, 한 명의 감독에 대한 작가주의적 비평은 넘쳐난다. 그러나 유독 배우와 그들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거나 분석 불가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백은하의 배우들’에서는 한 배우가 카메라 피사체로서 가진 시청각적 장점, 그들이 품고 연마한 선천적 본능과 후천적 기술력, 동료 노동자로서의 협업력과 교감(Communion) 능력, 개별의 삶이 만든 모방 불가의 드라마, 스타로서 산업적 가치, 동시대 아이콘으로서 사회적 영향력 등을 기준으로 각 배우들의 성취를 이야기할 것이다. <씨네21> 취재기자, <매거진t> <10아시아> 편집장을 거쳐 올레(Olleh)TV ‘무비스타 소셜클럽’ ‘백은하의 배우보고서’ 등을 이끌었다. KBS 1라디오 <백은하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을 진행하고 있다. 책 <우리시대 한국배우>(해나무), <안녕 뉴욕>(씨네21북스), <배우의 얼굴 24시>(한국영상자료원) 등을 썼다.
이 배우의 비트
뱀을 목구멍으로 토하듯이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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