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콩깍지’란 오랜 시간 바라보기 그런데도 내가 성형수술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 작은 눈이 내 몸뿐만 아니라 내 정체성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나 자신으로 사랑받고 싶은,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싶은 열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기준에 백기투항하는 건 어쩐지 나를 배신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다고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도 없다. 대체 어쩌라고? “나는 오랜 시간 나 스스로의 존엄과 매력을 입증해보고자 투쟁했지만, 지금도 한 손에 커피를 든 채 우아하게 직립보행할 수 없는 내 다리를 쳐다보면 한숨이 나온다.” 골형성부전증이 있는 변호사 김원영씨의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이 문장을 보고 나는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몸 때문에 입학 거부당한 적 없고, 지하철을 타려다 죽지도 않았으며, 계단 몇 개만으로 식당에서 무언의 출입금지를 당하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게 죄책감도 들지만, 그 심정의 한 자락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 몸을 가두는 잣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 제 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나도 내 몸의 일부가 ‘실격’당했다고 느끼니까. 이 책에서 배운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수용이다. 수용은 삶의 태도에 대한 결단이다. “나에 대한 그런 손가락질의 원인은 세상의 잘못된 평가와 위계적 질서이지만, 그에 맞서 내 존재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선언할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이것이 ‘정체성을 수용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실천적 태도이다.”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오래 바라보기다. 한 사람이 직접 쓴 이야기를, 그 풍부한 결을 오래 듣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콩깍지’는 어쩌면 알 수 없는 비합리적 힘에 도취된 상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섬세하게 분별한 그 사람의 미적 요소들이 완전하게 통합된, 그 사람의 초상화가 주는 아름다움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연골무형성증을 지닌 ‘티리온’을 7년간 보다보면, 캐릭터와 외모의 매력이 섞여버리는 것처럼 “한 사람이 인생에서 써나가는 자기 서사는 우리가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신체’에 통합되고, 농축되고, 종합되어 구현된다.” 한국에서 누가 작은 눈의 이야기를 들어줄까 그래서 나도 나한테 이렇게 말해본다. ‘내 눈을 바라봐, 내 눈을 바라봐, 이건 그냥 작은 눈이 아니야, 눈이 커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압력에 대한 내 나름의 도전이야. 이 작고 쪽 찢어진 눈을 지킨 내 삶의 태도야. 사랑스럽지 않아?’ 그런데 두렵다. 자신 없다. 여기가 어디냐. 언론이라는 <동아일보>는 북-미 협상 결렬 소식을 전하며 이목구비 또렷한 자사 기자 사진을 “아이돌급 외모로 인기” 따위 제목과 함께 내보내고, 1년 전 앵커 브리핑에서 안경 쓸 자유를 박탈당한 여성들의 상황을 씁쓸하게 전한 JTBC 뉴스에도 안경 쓴, 뚱뚱한, 늙은 여성 기자나 앵커는 한 명도 나오지 않는 곳이다. 누가 내 작은 눈이 하는 긴 이야기를 들어주기나 할까? 아무도 들어주지 않더라도 나는 내 이야기를 좋아할 수 있을까?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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