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그런데 애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타인 같은 자신을 발견했다. 초등학교가 둘 있는데, 브랜드 아파트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데가 ‘좋은 초등’으로 이름이 났다. 왜 좋은지는 모를 일이다. 친구 딸이 이 학교에 배정받았다. “정말 이상해. 그 ‘좋은 초등’ 다닌다고 할 때마다 뭔가 우쭐한 기분이 들어.” 내가 낯선 욕망의 숙주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관리라면 내 관리도 안 되기 때문에 부장 따위는 공짜로 줘도 싫다고 믿는데, 막상 다른 사람이 부장이 되면 조직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 같아 성질을 부린다. 이 분노와 결핍은 누구 것일까? 기억하는 사람 거의 없는 조교수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는 포털 인물검색에 나올 것 같은 설명으로 시작한다. 윌리엄 스토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노동으로 손마디가 굵었다. 가업을 이으려 농과대에 입학했다 영문학 강의를 듣고 진로를 바꿨다. 그 강의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14행의 짧은 시)를 만났다.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이파리들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는 계절 얼마 전 예쁜 새들이 노래했으나 살풍경한 폐허가 된 성가대석을 내게서 그대 그날의 황혼을 보리 석양이 서쪽에서 희미해졌을 때처럼 머지않은 암흑의 밤이 가져갈 황혼 모든 것을 안식에 봉인하는 죽음의 두 번째 자아 그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내게서 그대 그렇게 타는 불꽃의 빛을 보리. 양분이 되었던 것과 함께 소진되어 반드시 목숨을 다해야 할 죽음의 침상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인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윌리엄 스토너는 지독히 평범해서 특별하다. 세계대전이 두 번이나 거쳐 가는데도 이 삶엔 충격적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 아내와 사소한 오해로 등진 동료의 악의를 그만의 ‘고구마’ 방식, 관조로 견딘다. 그의 목숨을 앗아간 병명은 사망 원인 1, 2위를 다투는 암이다. 66년 인생을 따라가는 이 소설을 읽다 가장 많이 맞닥뜨리는 낱말은 ‘슬픔’과 ‘상실감’, ‘연민’이다. 그는 묵묵히, 자기 방식으로 시를 사랑했고 살았다.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 죽어가며 그는 자기에게 세 번 묻는다. 첫 번째 물었을 때, 남들 눈엔 실패작으로 보일 자기 삶을 관조한다.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두 번째 물었을 때, 그는 빛을 느낀다. 오후의 밝은 햇빛. “그리고 그것들이 진짜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물었을 때,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는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알고 있었다.” 진짜 나는 30대 어딘가에 있고 가죽만 10여 년 시간을 건너 어리둥절 여기 서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렇게 살다 죽는 건가 생각하면 허망하다. 그 허망함에서 고개 돌리고 싶어 확실한 욕망을 붙드는 건지도 모른다. 그게 남의 것일지라도. ‘중요한 건 어떤 인생이냐가 아니라 자기 인생이냐인데…’라고 쓰면서도, 나는 ‘외풍 탓에 손가락이 시렵네. 제너시스는 안 그렇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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