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동화 같은 환상은 강렬했다

400
등록 : 2002-03-12 00:00 수정 :

크게 작게

<가을동화> 윤석호 PD의 ‘자기복제’…<겨울연가>가 신드롬을 일으킨 배경

사진/ [겨울연가]
풍성한 화제를 몰고온 한국방송 제2텔레비전의 <겨울연가>가 이별(3월19일, 혹은 2부 연장시 26일 종영)을 앞두고 있다. ‘아쉽다’는 시청자도 있을 것이고, ‘잘 끝났다’고 속시원해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추측건대 후자의 경우는 본방송에 재방송, 그것도 모자라 드라마 홈페이지를 클릭해 반복 시청을 마다하지 않는 열성 아줌마팬의 남편들, 혹은 <겨울연가>의 등장으로 시청률이 20%대로 추락한 에스비에스의 <여인천하> 정도가 아닐까 싶다.

재탕 멜로+미스테리

김운용 야구감독의 어투를 빌리면 <겨울연가> 때문에 “오, 목도리도 뜨고, 폴라리스 목걸이도 뜨고, 바람머리도 뜨고, 촬영지도 뜨고, 배경음악도 떴다”. 가히 ‘신드롬’에 근접한 유행현상이다. 사실 방송가에서는 이같은 반향을 예상했다고도 동시에 예상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2000년 가을을 풍미한 <가을동화>의 윤석호 PD가 차기작으로 내놓은 <겨울연가>는 소위 기본은 하되 대박은 어렵지 않겠느냐고 예견됐다. 여기엔 시기의 심리도 적잖이 개입됐겠지만 전작보다 나은 속편이 없다는 통설, 외견상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틀거리 등도 영향을 미쳤다.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을 나눈 남녀(준상과 유진)가 있었다. 그러다 남자(준상)가 세상을 떠난다. 그로부터 10년 뒤 죽은 남자를 똑 닮은 남성(민형)이 나타나고,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여성(유진)은 이미 다른 남자와 정혼한 상태지만 “제 첫사랑이 저를 다시 부르면 어떡하죠?”라며 동요한다. 알고보니 그 남자(유진=준상)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과거의 첫사랑으로 밝혀진다. 처음엔 ‘데자뷔’(기시감)란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이 정도 얘기에 시청자들의 마음이 넘어갈 것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열광이었다.

윤 PD는 ‘자기복제’에 성공했다. 일례로 폴라리스 목걸이 선물장면처럼 원빈―송혜교에서 배용준―최지우로 배우만 달라졌을 뿐 노골적으로 전작의 설정을 재탕하면서 <가을동화>에서 선보인 장기를 재현했다. 이렇게 그림 같은 촬영장소를 족집게처럼 찾아내고 그 안에 배우를 아름답게 배치해 매혹적인 영상을 만들어내는 연출자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는 남다른 영상미와 뻔하지만 흥미로운 줄거리로 ‘웰 메이드(well-made)’ 멜로 드라마를 탄생시켰다.

모든 요소가 복습에 그쳤다면 <겨울연가>의 히트는 재미없는 성공스토리에 불과했을 터. 준상과 민형이 동일인일까 아닐까, 준상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등 미스터리적 요소를 미끼로 던지며 시청자의 궁금증을 꾸준히 자극한 스토리 구성,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에서 꺼내온 듯한 결 고운 대사, 드라마로서는 이례적인 신문광고와 인터넷 및 O.S.T를 통한 대대적인 마케팅 공세 등이 성공비결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잘 기획되고 잘 만들어진 종합선물세트 같은 드라마인 셈이다.

일탈의 심리를 파고들다

무엇보다 <겨울연가>의 힘은 남다르고 싶다는 특별함과 다른 현실을 꿈꾸는 일탈의 심리를 잘 파고든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주제는 변하지 않는 사랑, 첫사랑의 추억, 운명 같은 만남, 순결한 사랑 등 고전적인 사랑의 신화에 기대고 있다. 한 네티즌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 가운데 이런 게 있다. “상혁과 유진은 10년을 사귀었는데 키스 한번 못해봤다. 유진이는 처녀다. 근데 현실에선 3년만 사귀어도 반은 부부이고, 100일만 넘어도 권태기가 찾아온다. 드라마에선 모든 조연들이 주인공을 위해 자기 욕심없이 산다. 그러나 세상엔 아무리 착한 친구에게도 자기 것 다 퍼주며 향단이를 자처하는 사람, 별로 없다.”

이렇듯 자명한 비현실성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겨울연가>는 남녀주인공의 슬픈 사랑에 낭만적인 장치로 설득력과 자격을 부여해 나도 한번쯤 동화 속 주인공이고 싶다는 환상을 자극한다. 일상을 투영한 것보다 만화 같은 꿈이 더 강렬한 파장을 낳는다는 것은 지금 이 시각 우리네의 현실이 어떠한가에 대한 방증일지도 모르겠다.

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