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윤이상들’의 벅찬 연대

400
등록 : 2002-03-12 00:00 수정 :

크게 작게

진보적 음악을 위한 국제적인 소통의 장으로 거듭난 2002 통영국제음악제

사진/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2000년 시작된 현대 음악제가 올해부터 국제규모로 발돋움했다. 트래비스가 지휘한 창원시립교향악단의 연주회.
경남 통영에서 열리고 있는 2002 통영국제음악제(3월8∼16일)의 개막연주 지휘를 맡은 프랜시스 트래비스(81)의 감회는 남다르다. 그는 이번 음악축제의 주제이자 첫 연주곡인 윤이상의 <서주와 추상>(Fanfare & Memorial)을 82년 대한민국음악제에서 지휘했다. 67년 ‘동베를린 거점 간첩단 사건’ 이후 한국음악사에서 지워졌던 윤이상을 처음으로 무대 위에 올린 행사였다. 당시 플라자 호텔에 머물던 트래비스는 숙소에서 연주장소였던 세종문화회관까지 도착하는 중에 세번이나 검문을 받았다. 그는 “연주를 하는 중간에도 이게 마지막 순간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떨었다”고 회고한다. 20년이 지나 트래비스는 윤이상의 고향 통영에서 같은 곡을 그대로 재현했다. 이번에는 검문 대신 큰 환대를 받았지만 섭섭하긴 매한가지다. 생전에 입이 닳도록 고향 통영을 이야기하던 친구 윤씨와 함께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양인임을 잊지 말라”

사진/ 통영출신의 세계적 음악가인 윤이상.
올해부터 국제적 행사로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에는 윤씨의 가까운 친구였던 트래비스나 윤씨에게 사사한 이사오 마쓰시다처럼 윤이상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해외 음악가들이 대거 내한했다. 독일, 일본, 필리핀, 영국 14개 나라에서 찾아온 이들은 현대음악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뛰고 있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이다. 이 가운데 동베를린 사건 때 윤씨의 구명운동에 가장 앞섰던 트래비스는 윤씨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1959년 초연했던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나는 초연 전에 작곡과 토론하는 일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나에게 중요한 건 지휘자로서 이것을 관객들에게 들을 만하게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이상에 한해서는 예외였다. 그의 작품은 나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으며 그가 가진 불교나 노장사상 등의 음악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지휘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주목할 만한 현대음악가 5위 안에 꼽히는 윤이상의 음악을 제대로 지휘하는 지휘자가 왜 유럽을 통틀어 서너명에 불과한지에 대한 주석과도 같다. 서구의 화성체계를 전복하면서 동양의 사상을 음악 속에 드리운 윤씨의 음악이 서구 연주자들에게는 “풀어야 할 과제”였고 지휘자들에게는 “지독한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음악제 둘쨋날 열렸던 ‘윤이상의 제자들’이라는 제목의 음악회에 참가한 다섯명의 작곡가들 가운데 세명이 일본 출신이었다. 현재 일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현대음악가 대부분이 윤씨의 제자들일 정도로 윤이상의 제자들 가운데는 유난히 일본인이 많다. 자신이 이끄는 앙상블 ‘동풍’과 함께 음악제를 찾은 작곡가 이사오 마쓰시다는 아시아작곡자연맹(ACL)의 대표로 한해에도 서너번씩 한국을 오가며 연주한다.

“과거 항일투쟁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일본인을 사랑한다”는 윤씨의 말이 아직 귓가에 생생하다는 마쓰시다는 “자신이 동양인이라는 의식을 잊지 마라”던 윤씨의 이야기를 지금까지 음악활동의 신조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날 연주한 <만트라>는 인간의 백팔번뇌를 바이올린 현에 담은 작품으로 윤씨로부터 영향받은 그의 불교사상을 잘 보여준 작품. 특히 삼각형 모양으로 정렬한 다섯개의 연주대를 한 연주자가 이동해가면서 연주해 눈길을 끌었다. 이는 일본의 전통음악양식인 ‘조하큐’(序破急)를 도입한 방식으로, 바이올린 연주와 일본전통극 ‘노’(能)의 결합 등 형식 파괴에 앞서온 마쓰시다의 음악을 잘 보여준다. 그는 또한 작은 절이나 작은 시골마을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연주를 하는 등 독특한 실험을 꾸준히 해왔는데 난해하기로 유명한 윤이상의 곡도 그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로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난징대학살을 음악으로

사진/ 1937년 '남경대학살'을 음악으로 고발하는 [난징! 난징!]을 이번 음악제에서 아시아 초연한 비파 연주자 우만.
“95년 나가노에서 아마추어 앙상블을 반년 동안 지도해 윤 선생의 ‘무궁동’(無窮動)을 연주했다. 곡이 너무 어려워 리허설 때까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공연 전날 윤이상 선생의 임종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추모음악회로 바꿔 연주를 했는데 놀라운 정도로 완벽한 연주를 해냈다. 더욱 놀라웠던 건 녹음작업에서 이 곡만 싹 지워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윤 선생이 와서 곡을 가져가셨다고 말하곤 했다.”

79년부터 5년 동안 윤씨로부터 사사한 마쓰시다에게는 많은 음악동문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가 윤씨로부터 배운 내용은 다르다. 심지어 같은 시기에 윤씨에게 수학한 제자들마저 배운 내용이 전혀 달랐다고 한다. 윤이상이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면서 일정한 조류나 학파를 형성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가진다. 그는 지금까지의 음악적 전통이나 고유한 기법을 무너뜨리는 데 머무른 것이 아니라 작곡가 개개인이 자신만의 어법을 찾도록 지도했다. “윤이상 선생을 만난 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윤이상을 통해 나를 만났다는 것이다” <코우트>라는 창작곡으로 음악제에 참가한 영국 작곡가 키스 기포드의 말이다.

참가 음악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윤이상과 눈빛으로 접촉한 그의 후예들이라면 나머지는 그와 신념으로 교감한 참여적 음악가들이다. 이번 음악제의 소주제 가운데 하나인 ‘음악과 사회’ 그리고 ‘크세나키스를 기리며’는 우리 시대의 또다른 윤이상들이 모이는 자리다. 이 가운데 11일 아시아 초연을 한 <난징! 난징!>(2000)은 이번 음악제의 알맹이라고 할 정도로 주목받는 작품. 1937년 일본인 군대가 30만명이 넘는 중국인을 학살했던 ‘난징대학살’을 정리한 중국계 일본인 아이리스 창의 <난징대학살>을 미시간대학에 재직중인 중국인 작곡가 브라이트 쉥이 음악으로 만들었다. 독특한 것은 비파협주곡 형식으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중국의 비파라는 악기를 현대적인 음악 테두리 안에서 소개했다.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1992)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역사 자체보다는 희생자들을 회고하며 쓰여졌다”고 작곡가는 말한다. <난징! 난징!>의 서술자 역할을 하는 비파는 희생자이면서 목격자인 한 여성을 은유한다. 이곡을 선보이기 위해 한국을 찾은 중국의 대표적 연주자인 우만은 부모님이 난징대학살을 겪고 살아남은 희생자들로 아직 난징에 머무르고 있다.

“할머니로부터 난징대학살 때 양쯔강에 떠내려오던 시체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난징대학살에 대해서 알려진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끔찍한 대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80년 초 미국으로 유학 간 뒤 서구에서 주로 활동해온 우만은 아시아 각국의 전통음악들을 현대적으로 연결해내는 첼리스트 요요마의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등 아시아 음악의 세계화에 힘쓰고 있는 음악인이다. 특히 이번 음악제에서 한국의 젊은 작곡가 김지영씨가 작곡한 윤이상 추모곡 <상처입은 용>을 세계 최초로 소개한다.

크세나키스와 윤이상

이번 음악제가 윤이상과 함께 헌정을 바치는 또다른 인물은 그리스인 작곡가 크세나키스다. 그는 현대음악에 대한 영향력이나 사회참여적 삶이라는 두 가지 범주에서 윤이상과 손을 잡고 있는 인물이다. 2차대전 당시 20대 초반을 보내면서 그리스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 나치와 파시스트 정권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의 가담자였던 그는 시위 도중 얼굴에 포탄을 맞아 평생 반쪽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살았다. 그는 수학적이고 확률적으로 계산된 음악으로 반전에 대한 메시지과 짙은 휴머니즘을 직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제 규모로 발돋움하면서 <난징! 난징!>과 크세나키스를 초대한 통영국제음악제는 이제 윤이상 개인을 기리는 음악제에서 의미있는 현대음악가들의 연대를 추구하는 진보적 음악의 소통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