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김정수(70)씨는 서산개척단원 중에서 젊은 축에 든다. 1963년 9월28일, 15살에 서울 아세아극장 앞에서 구두닦이를 하다 끌려왔다. 그는 그 나이에 “22명이 맞아죽는 걸 봤다”고 말했다. 키가 작고 말라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밥을 안 줬다. 그곳에서 그는 기록을 남겼다. 뒷간에서 쓰라고 하루에 네 장씩 준 종이를 밥풀로 붙였다. 이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들통나면 또 잡혀갈지 모른다고 가족이 걱정해 태웠다. “못 배운 게 한”인 그는 대학노트를 사 이후 삶을 또 기록했다. 42권이다. “참 기가 막힌 삶인데 거기서 살아 나온 거 보면 나도 참 대단한 놈이에요. 나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두려운 게 없어요. 어떤 일도 할 자신 있어요. 일단 나를 3일만 써보라고 해요. (서산개척단을) 창피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저는 자식들도 다 여기 데려왔어요. 내가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지옥에서도 배움이 있었다고.” 명절이 되면 그는 홍삼 진액이며 막걸리며 사들고 모월리에 온다. 남아 있는 서산개척단 11명은 그에게 “나를 감싸줬던 사람들”이고 여전히 “마음 아픈 형님, 누님들”이다. 학대받은 운명에 감사한다 “내 가슴에 숨 쉬는 생명력은 그러한 것들로 위축될 만큼 연약하지 않았다. 생명의 의욕!” ‘박열의 아내’라는 수식어가 불필요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수기 <나는 나>에 “불행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썼다. 아버지는 천하의 난봉꾼, 이모와 바람나 집을 나간다. 명문가 출신이라 거들먹거리며 제 자식은 호적에 올려주지도 않는다. 홀로 설 수 없었던 어머니는 어린 가네코를 유곽에 팔아넘기려고도 했다. 무적자인 탓에 정식 학교에도 다니지 못한다. 조선에 살던 할머니가 양딸이랍시고 데려가는데 노비나 다름없다. 젓가락만 부러져도 굶기고 때린다. 조선인 이웃이 불쌍하다며 밥을 주려 해도 무서워 받아먹을 수가 없다. ‘아랫것’들과 어울려 가문 이름을 더럽힌다며 할머니가 때리는 탓이다. 책을 보면, 친구와 말 섞으면, 머리빗이 부러지면, 맞았다. 학대를 견디지 못해 치마에 돌을 싸고 물에 빠져 죽으려 하다 아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는 아직 사랑해야 할 것들이 무수하게 남아 있다.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다.” 7년 ‘노비’ 생활을 마치고 일본에 돌아와서도 배가 고프다. 비누 행상, 식모, 신문팔이를 해도 공부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을 수가 없다. 세상은 왜 그에게 이토록 모질까? 그런데 그는 자기 고통을 바탕 삼아 길거리 개에게도 공감하며, 어떤 권위나 권력에서도 자유로운 그 자신으로 끝까지 살다 23살에 감옥에서 숨졌다. “지금 나는 모든 과거에 감사한다. …내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고, 가는 곳마다 학대받은 내 운명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다면 아마 나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성격,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에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불운한 탓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참할수록 존엄해지는 경이로움 무엇을 경험하건 생명력으로 바꿔버리는 이들을 보면,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말한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을, 그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을, 그런 내면을 소유하고 있는 자의 힘. 비참해질수록 더 눈부셔지는 역설적인 그 힘”을 느낀다. 내가 입기는 거추장스럽고 버리기는 아까운 헌 옷 취급하는 삶을, 끝까지 자기 것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고, 그에 알맞은 낱말을 찾을 수 없다. 경이로울 뿐.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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