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읽기3 l 등번호
축구황제의 영광을 이어가는 10번… 히딩크 감독은 선수 활용도에 따라 배정
잘 알다시피 숫자는 그 이상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엘리베이터의 4층을 굳이 F층이라고 해둘 이유가 없다. 3, 7, 그리고 13…. 유난히 징크스를 많이 타는 운동선수라면 자신을 즉자적으로 가리키는 백넘버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
홍명보가 그렇다. 지난 시드니 올림픽 때 와일드 카드로 뽑혔던 홍명보는 난생처음 14번을 받게 된다. 줄곧 20번을 달았지만 최종 엔트리 18명은 1번에서 18번까지만 달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하는 수 없이 14번을 단 것. 14번 홍명보는 그뒤 줄곧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고는 급기야 허벅지 부상으로 올림픽 출전을 포기했다. 올림픽이 끝난 뒤 10월, 레바논에서 열린 아시안컵대회 때도 협회는 14번을 배정했는데 홍명보는 새까만 후배 이동국의 번호(사실 홍명보가 오랫동안 달았던) 20번을 원했고 그제서야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었다.
등번호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까닭
‘맏형’이 이 정도라면 다른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번에 유럽 전지훈련을 떠나면서도 백넘버를 둘러싼 약간의 소문이 있었다. 우선 대표팀에서 줄곧 10번을 달았던 최용수가 11번으로 밀려나고 그것을 송종국이 달았다는 점. 차범근, 변병주, 서정원으로 이어지는 준족의 11번은 우리나라의 경우이고 세계 축구에 있어 10번은 그라운드의 영웅을 뜻한다. 10번이 축구사의 영웅을 가리키게 된 것은 역시 펠레. 우격다짐의 격투기를 예술로 끌어올린 축구 황제 펠레의 10번. 그 이후 10번에 의해 축구사의 영광은 더욱 찬란해졌다. 플라티니, 마라도나, 마테우스가 있었고 이제는 지단, 히바우두, 토티의 번호로 여전히 초강세. 이번에 11번으로 거듭나면서(?) 최용수는 “10번은 보통 플레이메이커의 번호다. 오히려 스트라이커에게는 11번이 제격”이라고 여유를 부렸지만 섭섭한 기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히딩크 감독의 전략 및 이에 따른 선수 활용도가 이번 백넘버 배정으로 상당히 굳어졌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송종국이 공수의 중핵이 되는 플레이메이커 1순위라지만 그래도 최고의 번호 10번을 부여한 것은 단순한 위치 지정 이상의 의미가 있다다. 이천수의 14번도 의미심장하다. 고종수가 안방에서 씁쓸하게 월드컵을 맞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주전 골키퍼의 1번 또한 주목의 대상. 이운재가 그 주인공이 되었다. 김병지는 12번. 주전 골키퍼에게는 1번 이외의 숫자는 의미가 없다. 1번이 아니면 아닌 것.
축구선수들이 백넘버를 달게 된 것은 1933년 이후의 일이다. 1933년 12월22일에 벌어진 잉글랜드 FA컵 결승에서 에버턴은 1번에서 11번까지, 맨체스터 시티는 12번에서 22번까지 달았다. 선수교체 제도가 없었으니 그것으로 이름 구분만 가능하면 됐다(참고로 야구는 1929년 뉴욕 양키스 선수들이 처음). 그러다가 갖가지 포메이션이 도입되고 교체 제도 및 스무명이 넘는 엔트리가 구성되면서 다양한 번호가 생겼다. 9, 10, 11의 영광을 바짝 추격하는 번호가 6, 7, 8번. 중원을 장악하는 것이 최일선의 과제가 된 현대 축구의 원리를 잘 보여준다. 베르캄프, 베컴, 피구가 이 번호의 주역들. 특이하게는 요한 크루이프가 14번을 축구사에 남겼고 클린스만은 영국에서 뛰면서 농구선수들이나 쓸 법한 33번을 달기도 했다.
FIFA, 1번에서 23번으로 제한
미국이 주도하는 프로야구에는 영구 결번이 많다. 0번에서 99번까지 마음대로 써도 되니까 결번 처리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큰 까닭도 있지만 ‘미국식 영웅 만들기’로 결번 처리만큼 익숙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결번 처리의 영광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지만. 축구는 조금 어렵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엄격한 규정은 1번에서 23번까지로 제한하고 있다.
그 바람에 약간 우울한 소식이 들려온다.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는 지난해 은퇴한 마라도나의 업적을 드높이기 위해 자국 내 각종 대표팀에서 등번호 10번을 영구 결번 처리했다. 그런데 FIFA의 규정도 따르고 영구 결번도 지키자면 그들은 국제대회에 22명만 내보내야 한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주저없이 답할 수 있다. 국제대회 최종 엔트리를 24명으로 늘려야 한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10번을 달지 말아야 한다. 10번의 영광, 축구 영웅의 빛은 영원히 끝없이 타올라야 한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등번호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까닭

사진/ 그라운드 영웅들의 등번호를 배정받지 못한 최용수(오른쪽). 최용수는 국가대표팀에서 10번을 줄곧 지정번호로 달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