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에서 정전이 합의돼 한반도에 총성이 멎었지만, 용초도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북한 인민군 포로들은 1953년 8월 일반 포로 교환 때 판문점을 거쳐 북한으로 올라갔지만, 곧바로 새로운 포로들이 섬에 들어왔다. 국군 귀환포로였다. 용초도 포로수용소가 국군 귀환포로 집결소로 용도가 변경된 것이다.
이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몇 번이나 되물었을 정도로 내 귀를 의심했다. 섬 수동산 자락에서 내다보이는 한려해상의 풍광이 아름다웠지만, 배를 두 번 타고 들어와야 하는 고립무원의 ‘섬의 섬’이었다. 이런 곳에 공산군 쪽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학대, 굶주림, 질병, 압박과 회유를 동반한 ‘세뇌교육’에 시달리면서도, 심지어 유엔군의 폭격에도 살아남아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선택’한 국군 ‘귀환용사’들을 처박아놓은 것이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국군 귀환포로의 호칭을 ‘귀환용사’로 통일시키고 대대적인 시민 환영 행사를 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영웅’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충격은 국군 귀환포로 당사자들에게 더 컸다. 귀환포로 박진홍은 <돌아온 패자>(2001)라는 체험기에 당시 심경을 남겼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외딴섬 용초도에 가둬놓고 철조망까지 둘러치고 있는 것일까? 혼자 생각해보았다. 군 당국은 우리가 북쪽에 있는 동안에 붉은색 물이 든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빨갱이가 돼서 돌아온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았다. 당신들은 무엇이 붉은 것이고 무엇이 빨갱인 줄 알기나 아는가. 우리는 모두가 이쪽을 선택해서 돌아온 국군이다! 공산주의 사상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무엇이 좋은가를 스스로 판단해서 돌아왔다! …조국아! 나는 너를 그토록 사랑했건만 그것이 결국 짝사랑이었단 말인가! 나를 맞이하는 너의 첫 품이 용초도의 인민군 포로수용소란 말인가!”
❸ 일반 포로 교환에서 풀려난 국군 병사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1953년 8월23일. 전갑생 제공
그랬다. 박진홍은 스스로를 ‘귀환용사’가 아니라 ‘돌아온 패자’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용초도에서, 아니 그 출발점인 판문점 ‘자유의 문’을 통과하면서부터 무엇을 예감했던 것일까?
‘포로 처리’ 문제를 합의하지 못해 18개월 정도 전쟁이 더 진행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유엔군 쪽이 전달한 포로 명부에는 공산군 포로가 13만 명 정도 되었는데, 공산군 쪽이 전달한 명부에는 유엔군 포로가 1만1천 명 정도에 불과했다. 유엔군은 공산군 쪽이 포로 수를 축소한 것으로 보았다. 1951년 6월25일 북한군 총사령부는 유엔군 포로가 10만8257명이라고 주장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노동신문>(1951년 6월25일치) 보도였으니 북한군이 과장 선전했을 수도 있고 그사이에 유엔군 포로가 동사, 아사, 학대에 가까운 노역, 유엔군의 폭격으로 죽었을 수도 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4)에서도 나오듯, 한국군 포로들이 북한 인민군의 강압이나 회유로 인민군에 편입됐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약 11만 명에서 10%밖에 안 되는 포로 명부를 유엔군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유엔군은 ‘전쟁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1949)의 본국 무조건 송환 원칙(제118조)을 거부하고 자의에 의한 송환 원칙을 관철했다.
<한국전쟁>(2005)을 쓴 박태균이나 <판문점 체제의 기원>(2015)을 쓴 김학재 등 여러 연구자가 잘 논증했듯이, 자원 송환 원칙은 미국이 새로운 관점, 즉 심리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고안됐다. 전선이 고착돼 어느 쪽도 확실한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상황에서, 적 포로들이 송환을 거부하고 남는다면, ‘적’ 진영/체제가 사람들을 군대로 강제 동원해 전쟁터로 내몰았다는 증거가 되고, 더 나아가 ‘우리’ 진영/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승리하는 것이라는 관점이었다.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명분에서라도 승리하자는 새로운” 성격의 전쟁이 이중으로 전개된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 전쟁은 유엔군 쪽 수용소에서는 포로 성격에 따른 재분류, 전쟁범죄 조사를 겸한 (재)심문, (재)교육을 통한 강제된 선택으로 진행됐다. 그 과정에서 생긴 갈등은 포로 간의 유혈 충돌을 더 증폭함으로써 수용소 당국의 폭력적인 진압과 학살로 귀결됐다. 공산군 쪽이 관할하는 포로수용소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엔군이 ‘세뇌교육’이라 했던 정치적 사상 교화가 유엔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자료 미비로 엄밀한 학술 연구는 이뤄지지 못하지만, 구술 기록에 의거하면, 포로 구금 상태와 강제 노역은 포로 학대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군 포로가 인민군에 편입된 계기가 있겠지만, 포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생존 확률을 높이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유엔군과 공산군 모두 각각 관리하는 포로들의 정신과 몸을 포획하려는 시도를 치열하게 전개했다.
박진홍의 체험에서 나오는 “한 인민군 전사”(한국군 이병에 해당)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스스로 국군 포로였지만 인민군에 입대했다고 밝히면서 “고향에 가거든 내 소식을 전해”달라고 주소와 이름이 적힌 종이를 박진홍에게 건넸다. 이 사연은 반대급부로 ‘자원 송환’된 국군 포로의 의지를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다. 7862명이 부상병 포로나 일반 포로로 교환돼 돌아왔다. 그 의지의 배경은 이데올로기의 선택으로 결코 수렴되지 않는다. 박진홍의 말처럼 “고향이 있고 부모가 살아 있는 내 조국 대한민국”을 선택했다.
팬티 입고 처절한 애국 증명
❹ 이승만 대통령이 경기도 파주 문산 포로인수본부를 방문해 ‘귀환용사’ 인수 환영식에 참석했다. 1953년 9월3일. 이승만연구원 소장(조성훈, , 2014, 171쪽)
국군 귀환포로들은 판문점 ‘자유의 문’을 통과해 “대한부인회라는 어깨띠를 두른 부인들”의 따뜻한 환영과 보살핌을 받았지만, 불길한 예감에 빠졌다. 육군 총참모장 백선엽 장군의 “전우들 중 적의 강압에 못 이겨 본의 아닌 행동이 있었다 하여도 충심으로 반성하고 대한민국에 충성을 맹세”하라는 일장 연설이 불길했던 것일까? 귀환포로 박석태 하사는 머플러에 “대한청년의 의지는 꺾지 못하리라”는 혈서를 쓰고 다시 군 복무하겠다고 “애원”했다.(<조선일보> 1953년 8월6일치)
사진❷는 부상병 포로 교환(1953년 4월20일~5월 3일)으로 남쪽에 넘겨진 국군 귀환포로를 찍은 것이다. 304통신사진소대 조지프 H. 애덤스 이병이 찍은 사진 속 시각에서 중심 피사체는 사진 설명과 달리 조악하게 만들어진 태극기다. 뜨거운 수프를 앞에 두고도 직접 만든 저 깃발을 꼭 끼고 있는 포로의 심경은 어땠을까? 무엇을 예감했을까?
사진❸은 휴전 직후 이뤄진 일반 포로 교환(1953년 8월5일~9월7일)으로 판문점을 통과해 내려온 국군 귀환포로들이 힘차게 노래하는 모습을 찍었다. 귀환포로들은 인민군 복장의 포로복 상의와 바지를 다 벗어버린 채 팬티만 입고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죽음으로 애국을 입증하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포로에 대한 이중적 시선을 직감해서 더 자신의 애국과 충성을 증명하려 했을까?
사진❹는 국군 귀환포로가 자기를 증명하는 절정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1953년 9월3일 오전 9시40분에 열렸던 국군 ‘귀환용사’ 인수 환영식 모습이다. 사진 양 끝에는 ‘귀환용사’ 펼침막과 ‘환영 자유의 문으로’가 보인다. 정중앙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맥스웰 D. 테일러 미8군사령관이 있고, 양 옆으로 프란체스카 여사와 대한부인회 회장 박순천 의원을 비롯해 손원일 국방부 장관, 국군·유엔군 포로인수본부의 장병들과 기자들이 늘어서 있다. 이 대통령은 친히 위로하러 왔다면서 조국에 “재기봉공”할 것을 요구했다. 귀환포로들은 사진❸과 마찬가지로 팬티만 입은 채 이 대통령의 환영사를 듣고 있다. 굳은 표정의 ‘용사’들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처음에는 기쁨, 눈물, 고마움, 고향, 조국, 애국심, 충성 같은 단어가 뒤범벅돼 고양됐지만 불길한 예감의 단어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떨쳐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국군 귀환포로들은 모두 지체 없이 서울과 인천을 거쳐 LST(미군 수송선)에 올랐다. 행선지도 듣지 못했다. LST 배 밑창에 누워 있을 때, 불길한 예감은 차츰 현실이 되어갔다. 적 수중에 있었던 자신의 과거가 문제없는지 스스로 검열하기 시작했고, 누가 바다에 버려졌다는 식의 뜬소문이 돌면서 불길함은 공포로 치달았다. 그들은 그렇게 용초도 포로수용소로 밤낮없이 이틀 동안 나아갔다.
사상검증, 즉결처형, 자살
국군 공식 전쟁사에서 국군 귀환포로의 용초도행은 거의 ‘사각’에 가깝다. 일부 전쟁사에서 반공주의 필터로 걸러져 극히 파편화된 채 서술될 뿐이다. 최근에는 2014년 출간된 <6·25전쟁과 국군포로>에서 소략하게 다루었다. 차라리 당시 신문기사들이 용초도 귀환군집결소에 대한 단편적 정보를 제공한다. <동아일보>(1953년 9월19일치) 보도에 따르면, 귀환군집결소의 설치·운영 목표는 귀환포로들을 “사상적으로 확고한 인증을 받은 용사”로 거듭나게 하는 데 있었다. 그러니까 포로들이 공산주의 ‘세뇌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사상검증을 했다. 가령 적의 노래를 배우고 불렀거나, 강압으로 노역에 동원됐거나, 수용소 자치위원장 또는 간부로 활동했는지 등을 점검했다. 포로를 심문하고 동료를 고발하게 하고, 이를 다시 해명하게 하는 식의 ‘부역자’ 색출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군 특무대와 함께 포로 심문을 했던 미군 방첩대(CIC) 파견대가 만든 여러 심문보고서와 요원보고서는 이를 잘 보여준다.
국군 귀환포로 7862명은 그렇게 갑, 을, 병으로 나뉘었다. 갑종과 병종에 대해서는 재교육해 재복무시키거나 제대시켰지만, 을종에 대해서는 법에 따라 “처단”했다. 심지어 “즉결처형”했다는 논의도 있다. 박진홍의 회고에는 귀환군집결소에서 계속되는 자살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이 처참하게 죽어갔”던 상황에 대한 서술이 있다. 한산도로 소개된 용초도의 주민들도 용초도에 국군 포로가 들어온 뒤 밤만 되면 총소리가 자주 났다고 증언했다.
“국군 귀환포로들은 지옥에서 생환했지만, 또 다른 지옥에서 생존해야 하는 시험대에 놓였다”(<열전 속 냉전, 냉전 속 열전>, 278쪽, 2017)는 전갑생의 평가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박진홍의 “돌아온 패자”라는 인식도 용초도 인민군 포로수용소였던 잘못된 장소에 왔다는 불안감과 함께 사상검증을 통과하지 못하고 자칫하면 빨갱이로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이 귀환포로들에게 퍼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지옥에서 또 살아남아도 국방부의 보증처럼 대한민국 국민으로 완전히 포섭되는 건 결코 아니었다. 빨갱이 딱지는 군사정부가 ‘위기’를 운운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할 때마다 망령처럼 되살아났다. 그때마다 귀환포로가 얻은 국민 지위라는 건 참 부서지기 쉬웠다. 이건 국군 귀환포로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북한으로 돌아간 인민군 귀환포로도, 중국으로 돌아간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도 자의로 선택해 돌아간 조국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사상검증을 받아야 했다. 거기서 통과했더라도 현대사의 굴곡진 고비마다 그들은 인민 지위에서 미끄러지고 좌절했다.
‘평화의 절실함’ 보여주는 전쟁포로
이게 어디 ‘귀환포로’만의 문제일까. ‘반공포로’도 그랬다. 아니 포로라는 존재가 다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적/아’라는 양자택일적 시각, 냉전적 적대와 진영/체제 대결의 시각에서 벗어나 이제는 포로라는 존재를 평화의 지평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특별전 ‘전쟁포로, 평화를 말하다’를 두고 벌어진 일련의 소동은 포로 문제가 여전히 적대적인 반공주의 시각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준다. ‘(뉴)라이트’ 성향의 사람들과 언론은 이 전시가 평양박물관의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사실을 왜곡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전쟁포로야말로 그 존재 자체로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절실한 까닭을 역설한다는 걸 깨닫게 할 수 있을까.
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