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병보석 결정을 내린 야모토 재판장, 박길양의 필적, 박길양(왼쪽부터). 임경석 제공
남편 박길양을 잃은 슬픔에 망연자실한 김씨 부인. 임경석 제공
경찰은 이를 가만두지 않았다. 박길양 장례식이 반일운동의 상징이 되도록 방관하지 않았다. 사회단체연합장을 금지하고 오직 가족장으로 치르는 것만 허용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장례식 세부 절차에 하나하나 개입했다. 경찰은 매장이 아니라 화장을 종용했다. 그의 죽음이 사회적 추모와 저항의 표상이 될 가능성을 애초부터 제거하려 했다. 하마터면 그렇게 될 뻔했다. 그러나 젊은 아내 김씨 부인이 맞섰다. 화장이 아니라 매장을 원한다고 분명히 했다. 그는 삼엄한 경찰의 심리적 압박에 굴하지 않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식민지 국가 폭력은 30살 전후의 젊은 여성에게서 배우자를 빼앗아갔다. 그에게는 어린 남매가 있었다. 아비 없이 자라야 할 어린 승문과 승희를 키우는 것은 온전히 그 혼자만의 몫이 됐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김씨 부인은 기자에게 말했다. “그저 한 많은 일생이었지요. 살아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보았더라면 할 뿐이외다.” 그는 목이 메어 말끝을 맺지 못했다. 1월22일 장례식 날, 발인 장소는 서대문에 있는 노동총동맹 회관이었다. 정사복 경관 30여 명이 식장을 에워쌌다. 종로경찰서 오모리 순사부장이 현장을 지휘했다. 경찰은 장지로 향하는 상여 뒤로 오직 가족만이 뒤따르게 했다. 장례식에 참여하려 모여든 조문객 200여 명은 해산을 종용받았다. 가족이라야 오직 한 사람이었다. 고인의 아내만이 “애끓는 눈물로 얼굴을 적시면서” 상여를 뒤따랐다. 그 곁에는 친정 남동생 김근호만이 동행할 수 있었다. 명정이나 조기, 만장 등도 들지 못했다. 동지를 영결하려던 조문객들은 삼삼오오 짝지어 100m 혹은 200m 멀찌감치 떨어진 채 말없이 상여를 뒤따랐다. 서울 능가한 강화도 3·18 시위운동 장지는 수철리 공동묘지였다. 광희문 밖 4㎞ 지점에 있는데 오늘날 행정구역으로는 성동구 금호동에 해당한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장의 행렬은 종로, 동대문, 광희문, 신당리를 거쳐 수철리에 이르렀다. 장지까지 따라온 조문객은 28명이었다고 한다. 박길양은 피부가 하얗고 눈이 큰 청년이었다. 곱상한 외모였다. 키는 164㎝, 당시 기준으로 성인 남성 평균쯤 되는 몸집이었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행동거지는 과감하고 단호했다. 정신도 열렬했다. 그는 저 유명한 강화도 3·1운동의 능동적인 참가자였다. 1919년 3월13일 부내면 장날에 시작된 강화도 3·1운동은 4월12일까지 한 달 내내 계속됐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3월18일 강화 읍내 시위였다. 이날 시위에 무려 2만여 명이 참가했다. 놀라운 수였다. 당시 강화군 인구는 7만2천여 명이었다. 시위 참가자는 군내 전체 인구의 28%에 이르렀다. 부속 섬에 사는 수를 제외하면 3명 중 1명꼴로 시위에 가담한 셈이다. 3·1운동기에 일어난 전국 모든 시위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한 시위였다. 경찰 집계를 보면 참가자가 가장 많은 최대 시위는 강화도 3·18 시위(2만 명)이고, 그다음이 경남 합천 3·23 시위(1만 명)와 서울 3·1 시위(1만 명)였다. 박길양이 강화도 3·1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구체적인 정보는 발견되지 않았다. 강화도에서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45명이고, 그중에서 35명이 징역 또는 태형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박길양이란 이름은 거기에 없다. 그는 요행히 경찰에 체포되지 않았던 것이다. 만세시위운동이 퇴조하자 박길양은 새 방향을 모색했다. 시위운동이 불가능한 조건에선 무장투쟁을 벌이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독립군자금 모금에 뛰어든 것은 그 까닭이었다. 그는 경기도와 삼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군자금 모금에 헌신했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1년6개월간 징역살이를 했다. 그는 ‘열렬한 독립운동자’였다. 옥살이를 마치고 출감한 박길양은 해방투쟁을 위한 새로운 이론과 방법에 눈떴다. 사회주의 사상이 그것이다.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민중을 조직화·의식화해 스스로 혁명운동 주체로 나서게 돕는 것이 지름길이라 인식했다. 거족적인 혁명을 일으켜 식민지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대중운동 속으로 뛰어들었다. 합법적 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함과 동시에 공산주의 비밀결사에도 가담했다. 박길양은 청년운동에서 미래 비전을 보았다. 청년을 조직하고 계몽하는 일에 열성을 보였다. 먼저 강화군 부내면의 양대 청년단체를 통합해 강력한 단일 청년단체를 만들었다. 1924년 3월 창립한 강화중앙청년회가 그것이다. 그는 이 단체의 간부로 선출돼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강화군 내 웅변대회를 열고, 강화청년단체 연합 육상경기대회를 주관하며, 경성에 유학 중인 강화 출신 학생들의 여름 순회 강연을 주최하고, 교육 기회를 놓친 청년층을 위해 야학을 만들었다. 비밀결사에도 가담했다. 합법 공개단체의 역량은 한계가 있었다. 실정법 안에서만 활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박길양은 고려공산청년회에 들어갔다. 강화도 내에 공청 세포단체를 조직하고 그 비서가 되었다. 중앙 상층부 논의 테이블에도 진출했다. 1925년 4월18일 경성 시내에서 비밀리에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러나 비밀결사는 탄로 나기 쉬운 위험한 운동이었다. 1925년 12월 초였다. 박길양은 일본 경찰에 비밀결사 가담 혐의로 체포됐다. 경성 종로경찰서에서 파견된 경찰대에 포박당했다. 자신의 과오 때문이 아니었다. 멀리 신의주에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우연적인 사건 때문에 공청의 비밀이 누설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박길양의 생애 두 번째이자 마지막 감옥살이의 막이 올랐다. 미완의 꿈, 강화도로
1993년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 박길양 부부의 합장 무덤 묘비. 임경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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