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노조체제에 균열을 냈던 장본인 최재호, 리스회사 사장이 되어 베트남을 움직인다
“모두들 베트남 사람인 줄 안다니까요.”
노조위원장에서 사장으로 변신한 최재호(54)씨가 말했다. 작은 체구에 선탠한 듯한 피부색, 인상까지 영락없다. 베트남에서 한 7년 살면 그럴까? 집안일로 아주 잠깐 서울에 다니러 온 그는 꽤 오래 전에 베트남과 인연을 맺었다.
낙천낙선운동의 효시?
“전국사무금융노련 위원장직을 맡아 일하다가 94년 현직에 복귀하면서였지요.” 당시 그가 근무하던 모 리스회사는 베트남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회사 간부였던 선배가 그를 낙점했다. 주위에서는 10년간 노동조합 일을 하며 ‘놀다온 사람’인 그에게 왜 그 일을 맡기느냐며 만류를 했다. 당시만 해도 외국근무는 일종의 혜택이었다. 그러나 그 간부는 최재호가 아니면 감당이 어렵다고 무조건 밀어붙였다. “가서 보니 진짜 골치가 아팠어요. 베트남은 일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워낙 외세에 많이 시달려서 그런지 사람들이 협상할 때 굉장히 까다롭지요. 협상을 깰 각오를 하지 않으면 협상에 임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옛날에 키신저도 손들었잖아요. 평생을 이념에 헌신한 사람과는 협상이 안 된다, 그러면서 말이지요.” 협상의 터널을 뚫는 동안 그는 선배가 왜 자기를 보냈는지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역전의 용사. 80년대 한국 단일노조체제에 균열을 일으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애초 그는 리스회사 과장 명함을 갖고 ‘평범한 시민’으로 조용히 살던 사람이다. 월급 많이 주는 정부 투자기관에서 가만있으면 잘사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참을 수 없는 민주화의 열망’과 사장하고 ‘할 얘기 다 하고 난 뒤의 속 후련함’의 경험이 그를 달라지게 했다. 당시 모든 노조는 일단 한국노총 산하에 들어가야만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고개 숙이고 들어가고 싶지 않은 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이 모여 깃발을 들고 뛰쳐나와 ‘불법적인’ 자유금융연맹을 만들었다. 그 선두에 그가 있었고 그는 합법성 쟁취를 위해 힘겨운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88년에 운동은 성공을 거두었고 비한국노총 계열의 연맹, 언론연맹, 병원연맹, 전교조가 줄줄이 탄생하였다. 1991년 “노동조합 탄압하는 정당을 찍지 말자”고 해서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된 전력의 소유자인 그를 ‘낙천낙선운동의 효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사무금융노련 위원장으로 일하며 최 위원장은 기업의 이해구조가 서로 판이하게 다른 금융업계 노조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 비상한 의지와 능력을 가진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베트남에서 다시 발휘되었던 것이다. 탁월한 능력에 월드뱅크도 놀라다 최재호씨가 현지법인 사장직을 맡고 있는 ‘베트남 국제 리스회사’에는 세계은행, 프랑스 은행, 일본 라우조라 뱅크, 베트남 공상은행, 한국쪽 은행이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애초 베트남에는 리스법이란 게 없었는데 그가 한국의 법을 참고해서 만들었다. 그 법은 지금 그곳 업계의 전범이 되고 있다.(간단히 말해서 리스업이란 돈이 없어 기계를 살 수 없는 업체에 기계를 마련해주어서 공장이 돌아가도록 해주는 일이다. 상세한 내용을 원하는 독자는 경제학 사전을 참조하시라.) 지금까지 그의 거래업체는 300여군데. 총 투자금액은 3500만달러다. 놀랍게도 그동안 단 한건의 부실기업도 발생하지 않았다. 탁월한 능력에 월드뱅크도 놀랐다. 그의 성공의 노하우는 정확한 업자 선정에 있다. 리스신청 하는 대상에게 재무재표를 요구하지 않는다. 사업자 등록증도 건성으로 본다. 은행 거래실적? 베트남도 은행 문턱이 높기 때문에 그런 것을 요구하면 서운한 일이다. 그는 전기사용 영수증을 본다. “정부에서 발행하는 것이지요. 이것만 보면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단번에 알 수 있거든요. 변화를 보면 가동률도 정확히 알 수 있지요. 재무재표요? 엔론 사태를 보면 잘 알 수 있잖아요. 국제적인 회계법인이 감사를 했는데도 미국 국민이 전부 다 속았잖아요. 오히려 이게 더 정확하지요.” 베트남 사업전문가다운 표정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나는 살면서 듣고 본 경험을 살려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한전 아니, 베트남 전기공사 직원한테 봉투 찔러주고 ‘가라’로 영수증 떼오는 그런 업자도 있지 않겠느냐? 그가 펄쩍 뛴다. “베트남 사회는 철저한 문서주의예요. 프랑스 식민지배 영향 탓이기도 할 거예요. 문서와 도장을 목숨만큼 여겨요. 그 사람들은 도장을 경찰에 등록해둬요. 보통서류에도 회사 직인이 없으면 아무 효력이 없어요. 뭐든지 그렇지요. 우리 직원이 관공서에 들어갈 때도 내가 사인하고 도장 찍은 소개장이 없으면 들여보내 주지를 않아요. 게릴라 시절 경험이 더해진 면도 있지요. 전쟁할 때, 그냥 초대장 받고 갔다가 적들에게 몰살당한 예가 많았거든요. 아주 철저합니다. 물론 위조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또 우리에게는 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얘기 들어보면 대충 감이 와요. 이게 되는 집인지 안 될 집인지 말이죠.” 그럼 편지를 쓰다가 잘못 썼을 때라도 반드시 두줄로 긋고 본인의 인감도장을 찍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노조결성을 위해 청춘을 바친 그가 지금은 사용주가 되어 있다. 그의 회사 직원은 모두 서른명. 노조결성이 되어 있는가? “사실상 있는 거지요. 상급단체에 등록만 안 되어 있어요. 등록문제 이전에 상호이해가 가장 중요하잖아요? 제가 노조활동 할 때 사용주들과 관계에서 가장 답답했던 것이 민주적인 의사교환이 없다는 것이었거든요. 우리는 늘 같이 얘기를 합니다. 노조 대표를 뽑아 인사위원회 같은 중요회의에도 참여시키고 투표도 합니다.” 기업의 발전과 베트남의 발전
그럼 형식적으로는 결성이 안 되어 있다는 말인데, 혹시 “얘기 다 들어주는데 굳이 결성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무언의 암시”를 주지는 않는가? 옛날 그의 윗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그런다고 들을 사람들이 아니지요. 자주성이 얼마나 강한 민족인데요. 아시잖아요. 전세계에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 베트남에 아직 미국 항공사가 발을 못 붙인다고 덧붙이며 그는 그곳의 노동조합을 설명해준다. “사회주의 내에서 노동조합은 우리하고는 사회적 역할이 다르지요. 국가조직, 생산의 대리인으로 사용주와 아주 협조적이지요.”
8년 전 완전히 무에서 시작한 리스 사업이 지금은 정상궤도에 올랐다. “정말 은근히 자랑스럽지요. 사실 고백하자면 흑자경영에 신경이 많이 쓰여요. 허허허….” 그는 “사람 변했네”라는 소리 들을 각오를 한 양 멋쩍게 웃는다. 그러나 그의 웃음 속에 뭔가 단단한 게 짚인다. 사용주와 노동자간의 충돌이나 마찰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해소해보겠다, 그래서 행복한 기업 발전과 베트남의 발전을 함께 이루고야 말겠다”라는 의지. 그는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걸린 ‘슬픈 문제들’에 대해 묻자 그는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베트남을 보는 시각은 매우 현실적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과거를 분명히 짚고 가긴 하지만 그 과거가 걸림돌이 되게 하지는 않습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나 자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지금, 오늘, 어떻게 해야 미래가 발전하는지에 그 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재호씨는 자기가 기업인으로서 베트남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이 방식이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적인 관계에 분명 도움이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곳에 불어닥치고 있는 한류열풍에 대해 물어보았다. “드봉이 잘 팔려요. 베트남 여성들은 그걸 바르면 김남주처럼 예뻐질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그는 한류열풍 덕에 아시아인의 정체성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노조위원장 출신이 사용주가 되어 일한다는 것, 게다가 우리가 빚을 진 나라에서 일하기란 마치 저울대 위에 서 있는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명쾌하다. “저는 특히 잘해야 합니다. 지난 세월, 사용주들에게 못한다고 앞장서서 욕을 했는데 제가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어디 진실 규명이 되겠습니까?” 3월의 바람이 부는 여의도에 그가 서니 소나무가 별안간 야자수로 바뀐다.
권은정/ 자유기고가

사진/ 노조위원장 출신이 사용자가 되어 일한다는 것, 게다가 우리가 빚을 진 나라에서 일하기란 마치 저울대 위에 서 있는 기분일 것이다. (김종수 기자)
“전국사무금융노련 위원장직을 맡아 일하다가 94년 현직에 복귀하면서였지요.” 당시 그가 근무하던 모 리스회사는 베트남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회사 간부였던 선배가 그를 낙점했다. 주위에서는 10년간 노동조합 일을 하며 ‘놀다온 사람’인 그에게 왜 그 일을 맡기느냐며 만류를 했다. 당시만 해도 외국근무는 일종의 혜택이었다. 그러나 그 간부는 최재호가 아니면 감당이 어렵다고 무조건 밀어붙였다. “가서 보니 진짜 골치가 아팠어요. 베트남은 일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워낙 외세에 많이 시달려서 그런지 사람들이 협상할 때 굉장히 까다롭지요. 협상을 깰 각오를 하지 않으면 협상에 임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옛날에 키신저도 손들었잖아요. 평생을 이념에 헌신한 사람과는 협상이 안 된다, 그러면서 말이지요.” 협상의 터널을 뚫는 동안 그는 선배가 왜 자기를 보냈는지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역전의 용사. 80년대 한국 단일노조체제에 균열을 일으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애초 그는 리스회사 과장 명함을 갖고 ‘평범한 시민’으로 조용히 살던 사람이다. 월급 많이 주는 정부 투자기관에서 가만있으면 잘사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참을 수 없는 민주화의 열망’과 사장하고 ‘할 얘기 다 하고 난 뒤의 속 후련함’의 경험이 그를 달라지게 했다. 당시 모든 노조는 일단 한국노총 산하에 들어가야만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고개 숙이고 들어가고 싶지 않은 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이 모여 깃발을 들고 뛰쳐나와 ‘불법적인’ 자유금융연맹을 만들었다. 그 선두에 그가 있었고 그는 합법성 쟁취를 위해 힘겨운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88년에 운동은 성공을 거두었고 비한국노총 계열의 연맹, 언론연맹, 병원연맹, 전교조가 줄줄이 탄생하였다. 1991년 “노동조합 탄압하는 정당을 찍지 말자”고 해서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된 전력의 소유자인 그를 ‘낙천낙선운동의 효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사무금융노련 위원장으로 일하며 최 위원장은 기업의 이해구조가 서로 판이하게 다른 금융업계 노조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 비상한 의지와 능력을 가진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베트남에서 다시 발휘되었던 것이다. 탁월한 능력에 월드뱅크도 놀라다 최재호씨가 현지법인 사장직을 맡고 있는 ‘베트남 국제 리스회사’에는 세계은행, 프랑스 은행, 일본 라우조라 뱅크, 베트남 공상은행, 한국쪽 은행이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애초 베트남에는 리스법이란 게 없었는데 그가 한국의 법을 참고해서 만들었다. 그 법은 지금 그곳 업계의 전범이 되고 있다.(간단히 말해서 리스업이란 돈이 없어 기계를 살 수 없는 업체에 기계를 마련해주어서 공장이 돌아가도록 해주는 일이다. 상세한 내용을 원하는 독자는 경제학 사전을 참조하시라.) 지금까지 그의 거래업체는 300여군데. 총 투자금액은 3500만달러다. 놀랍게도 그동안 단 한건의 부실기업도 발생하지 않았다. 탁월한 능력에 월드뱅크도 놀랐다. 그의 성공의 노하우는 정확한 업자 선정에 있다. 리스신청 하는 대상에게 재무재표를 요구하지 않는다. 사업자 등록증도 건성으로 본다. 은행 거래실적? 베트남도 은행 문턱이 높기 때문에 그런 것을 요구하면 서운한 일이다. 그는 전기사용 영수증을 본다. “정부에서 발행하는 것이지요. 이것만 보면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단번에 알 수 있거든요. 변화를 보면 가동률도 정확히 알 수 있지요. 재무재표요? 엔론 사태를 보면 잘 알 수 있잖아요. 국제적인 회계법인이 감사를 했는데도 미국 국민이 전부 다 속았잖아요. 오히려 이게 더 정확하지요.” 베트남 사업전문가다운 표정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나는 살면서 듣고 본 경험을 살려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한전 아니, 베트남 전기공사 직원한테 봉투 찔러주고 ‘가라’로 영수증 떼오는 그런 업자도 있지 않겠느냐? 그가 펄쩍 뛴다. “베트남 사회는 철저한 문서주의예요. 프랑스 식민지배 영향 탓이기도 할 거예요. 문서와 도장을 목숨만큼 여겨요. 그 사람들은 도장을 경찰에 등록해둬요. 보통서류에도 회사 직인이 없으면 아무 효력이 없어요. 뭐든지 그렇지요. 우리 직원이 관공서에 들어갈 때도 내가 사인하고 도장 찍은 소개장이 없으면 들여보내 주지를 않아요. 게릴라 시절 경험이 더해진 면도 있지요. 전쟁할 때, 그냥 초대장 받고 갔다가 적들에게 몰살당한 예가 많았거든요. 아주 철저합니다. 물론 위조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또 우리에게는 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얘기 들어보면 대충 감이 와요. 이게 되는 집인지 안 될 집인지 말이죠.” 그럼 편지를 쓰다가 잘못 썼을 때라도 반드시 두줄로 긋고 본인의 인감도장을 찍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노조결성을 위해 청춘을 바친 그가 지금은 사용주가 되어 있다. 그의 회사 직원은 모두 서른명. 노조결성이 되어 있는가? “사실상 있는 거지요. 상급단체에 등록만 안 되어 있어요. 등록문제 이전에 상호이해가 가장 중요하잖아요? 제가 노조활동 할 때 사용주들과 관계에서 가장 답답했던 것이 민주적인 의사교환이 없다는 것이었거든요. 우리는 늘 같이 얘기를 합니다. 노조 대표를 뽑아 인사위원회 같은 중요회의에도 참여시키고 투표도 합니다.” 기업의 발전과 베트남의 발전

사진/ 사무금융노련 시절의 후배들과 함께. 그 시절 최 위원장은 이해구조가 서로 판이하게 다른 금융업계노조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 비상한 의지와 능력을 가진 인물로 부각됐다.(김종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