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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장래희망은 정규직

입시정책보다 더 관심이 가게 된 노동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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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2-28 14:17 수정 : 2018-12-3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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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봉규 기자

내 아이는 동물을 무척 좋아한다. 어릴 때 장래희망은 개였다. 사람은 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태어나면 개로 태어나겠다고 목표를 바꾸었다. 아장아장 걸을 무렵에는 함께 산책하던 보호자가 이웃과 얘기 나누는 사이, 지나가던 개 한입 나 한입 사이좋게 요플레를 나눠 먹기도 했다. 거의 매일 집 가까운 동물원을 다녔다. 아이 양육을 전담하면서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는데 왜 출근하고 있는가’, 원숭이사 앞에서 ‘뻗치기’ 하며 실존적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하도 자주 만나 서열 낮은 수컷 원숭이와는 눈이 맞을 지경이었다. 덕분에 일부 양과 캥거루는 얼굴은 물론 성격도 구별하게 되었다. 시력 잃은 예쁜 캥거루 ‘큰눈이’는 잘 살다 갔는지, 늘 우리를 탈출하던 질풍노도 청소년 ‘양순이’는 어찌 되었는지 안부가 궁금하다. 입장권이라도 모아둘걸 그랬나. 혹시 나중에 애가 동물원 취직할 때 도움이 되지 않으려나.

아이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진로희망 조사서를 제출했다. 아이가 희망하는 진로를 보호자도 동의하는지 묻고 희망 사유를 적는 절차인데, 담임선생님이 교육행정정보시스템에 올라가니 부모와 잘 상의해서 신중히 적어내라고 하셨단다. 막연해도 안 된다. 그냥 운동선수는 안 되고 야구선수, 교사 말고 국어교사, 이래야 한다. 아이는 ‘사육사’를 적었다. 스스로 생각한 이유는 “동물을 좋아하고 힘이 세기 때문”이란다.

나는 그냥 사육사 말고 ‘정규직 사육사’라고 적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이도 ‘힘이 세야 한다’고 알고 있듯이 한 시절 동물원을 ‘출퇴근’하며 사육사들의 노동환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주 갔던 동물원은 구역이 나뉘어 일부 동물사는 외주업체가 관리하고 있었다. 그중 한 실내 동물사는 여러 종류의 작은 동물들이 저마다 방을 쓰고 있어 관리에 손이 많이 가고 방문객 편의도 신경 써야 했다. 외주업체의 어린 직원들이 애쓰고 있었다. 정규직 사육사들과 처우와 노동조건에서 차이가 많아 보였다.

아이 머리가 굵어지며 입시정책보다 노동정책에 더 관심이 간다. 세금 내고 공교육에 맡겼으니 학교에서 다 해줄 것이라 떠들고 다니지만, 사실 그렇게 믿고 싶어서다. 입시 레이스에 발을 들이지 않은 이유는 인풋(투입) 대비 아웃풋(산출)의 가성비를 생각하면 실속 없는 짓인데다 솔직히 내 능력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초등 학부모 대상 교육청의 진학·진로 설명회에 갔다가 입시정보 책자의 두께에 질려 도망치듯 귀가해버린 적도 있다. 다행히 아이도 별 욕심이 없으니 이렇게 설렁설렁 키우면 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최근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하청업체 노동자 김용균씨 사망 소식을 들으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잘 안 쉬어졌다. 내 아이가 위험한 일에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걸 감당할 수 있을까. 고도성장기에 태어나 운 좋게 4년제 대학 나와 아이엠에프(IMF) 전에 취업하고 정규직 월급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처지에서, 우리 사회 양극화 현실을 너무 쉽게 내 편의대로 해석하고 건너뛴 것은 아닐까. 아이에게 어떤 것을 준비시키고 가르쳐야 하나. 입시 경쟁 말고는 어떤 답이 있을까. 순간 아득하게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은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의 모습이었다. 머리 질끈 묶고 평상복 차림으로 방송 뉴스에 출연하고 검은 패딩 하나 걸친 채 집회 현장과 국회를 오가며, 하청에 재하청으로 사람을 갈아넣는 위험천만한 노동환경을 바꾸자고 고군분투하는 ‘엄마’를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내 아이가 밥벌이에 나서기 전에 최소한의 안전망은 확보해줘야 한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위해 애쓰신 김미숙씨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법 바꾸면 나라가 망한다던 정치인과 정당도 똑똑히 기억하련다. 최선을 다해 응징할 것이다. 어린 비정규직들의 목숨을 담보로 유지되는 경제와 나라라면 망해도 된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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