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하지 않는, 선악을 가르지 않는…박찬욱·류승완 감독이 말하는 필름누아르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39) 감독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다찌마와 Lee>의 류승완(29) 감독은 서로에게 “영화의 스승”이자 “인생의 스승”이다. 두 감독 모두 영화계에서 ‘뜨기’ 전부터 서로의 진가를 알아보고 절친하게 지내왔고, 지금은 <반칙왕>의 김지운 감독, <플란다스의 개>의 봉준호 감독, 장편 데뷔작을 준비중인 임필성 감독 등과 더불어 일종의 ‘동인’처럼 어울려 지낸다. 서로의 영화에 직간접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는 사이인 셈이다. 지난 3월1일 류승완 감독의 실질적인 첫 장편 <피도 눈물도 없이>(이하 <피눈물>)가 개봉한 데 이어, 오는 28일 박찬욱 감독의 신작 <복수는 나의 것>이 관객을 찾아간다. 그런데 하필 두 작품 모두 누아르다. <피눈물>은 “밑바닥 인생의 두 여자가 투견장의 판돈이 든 돈가방을 훔치는 액션누아르”이고, <복수…>는 유괴당했다가 숨진 딸의 복수를 처참하게 벌여나가는 아버지(송강호)의 모습을 그리는 누아르다. 필름누아르를 문학장르로 보자면 하드보일드(수식없이 건조한 문체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문학 스타일)에 해당할 텐데, <복수…>는 “한국 최초의 하드보일드”라는 표어를 붙였다. 올해에는 누아르, 스릴러, 호러같은 어두운 장르의 영화가 부쩍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래서 두 감독을 초빙해 누아르를 ‘안주’삼아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피눈물>이 통속, 원색적이란 느낌의 ‘펄프’란 말을 누아르 앞에 붙인 까닭부터 시작됐다.
펄프느와르와 ‘메롱작전’
박찬욱(이하 박) 펄프누아르가 뭔데?
류승완(이하 류) 김지운 감독이 던져준 말인데, 전 처음에 이런 식으로 생각했어요. 어둡고 축축한 뒷골목에서 고양이가 생선머리를 찾아 헤매는데 저쪽에서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또박또박 걸어오는….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고, 무겁지만 어둡지 않은. 박 경쾌의 경은 가벼울 경자 아니야? 류 어쩌다 말이 바뀔 때도 있어요. 어둡지만 무겁지 않은. (웃음) 박 내 말은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다는 말은 모순이다 이거지. 류 펄프누아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인데 뭐. 박 이건 말 된다. 빠르지만 가볍지 않은. <피눈물>은 빠르잖아. 가이 리치 영화(<록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스내치>)하고 비슷하기는 하지만 훨씬 처절해. 가이 리치는 영화를 산뜻하게 끝내잖아. 마돈나한테 장가간 남자와 강혜정(<피눈물>을 제작한 ‘좋은 영화사’의 기획실장)하고 결혼한 남자의 차이랄까. 류 ‘타란티노(<펄프픽션> <재키 브라운>)다’, ‘가이 리치다’, 이런 이야기 나오는 거 피하려고 굉장히 애썼는데, 그런 말들 많은 거 좀 억울해. 영향받은 걸 숨기겠다는 게 아니고, 극단적으로 몰아붙이고 네오갱스터나 최근 필름누아르의 냄새를 풍기는, 이를테면 고전적인 액션영화의 흥분은 없잖아요. 제 나름대로 퓨전 장르를 만들어내려고 한 건데. 박 맞아, 완전히 달라. 류 <공동경비구역 JSA>의 각본을 제가 썼으면 북한군 초소에서 총싸움하는 게 한 40분 걸렸을 거예요. 탈출하는 과정도 길고. 이렇게 취향이 비슷하고 영향받은 게 같더라도 다른 건데. 박 어디서 많이 본 것처럼 시작해서 살짝 다른 데로 빠져서 엉뚱하게 끝내는 영화가 상업영화를 하는, 중요한 작전 중 하나인 거 아닌가. 주인공이 다해서 몇명이야?
류 중요한 대사를 치고 빠지는 인물이 17명.
박 그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 안에) 다 들어오니까 그게 장점이야. 여자들의 액션이 강한 영화라고 하지만, 그것도 뺑끼 같아. 그런 척했다가 다른 인물들이 다 중요하게 부각되니까.
류 일종의 메롱(혀 내밀며) 작전이죠. 그런데 <피눈물>에서 경선이(이혜영)가 ‘돈으로 세상 사는 거 아냐’ 하고는 정작 돈을 딱 챙겨가는 장면에서 이혜영 선배는 좀 어색하다고 하는데, 저는 재밌다고 밀어붙였어요. 촬영 때 아무도 안 웃었는데, 관객은 그 부분에서 제일 많이 웃더라고요. 드디어 B(급)의 세상이 오기 시작한 거 같아. 드디어.
박 누아르의 매력이라고 하면, 일단 선악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으니까 현실적이라는 게 있겠지. 장르영화이면서 현실적이라는 게 사실 모순이지만 그게 가능한 게 필름누아르니까.
그리고 감상적이지 않아서 감상적인 영화보다가 이런 영화보면 개운하고. 이런 면에서 지난해 유행한 조폭영화들은 누아르 정서하고 차이가 많아.
<복수…>, 세고 짧다
류 그런데 지난해 흥행이 너무 잘돼서 작품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못 받은 게 <친구> 같아요. 전 굉장히 좋게 봤어요. 전통적 의미의 갱스터이자 필름누아르잖아요. 현상도 특수현상하면서 누아르의 음영 대비도 확실하게 했고. 정공법으로 만든 영화인데.
박 그렇지. 명대사 진짜 많잖아. 장동건이 마지막에 한 말을 지금은 재밌게 이야기하지만 처음 봤을 때는 충격이었지. 어떻게 그런 말을 생각해냈을까 몰라. 누아르의 특징에 하나를 더하자면, 스타일이 강하다는 거잖아. 난 이런 점에서는 달라. <복수…>는 스타일이 강하지 않거든.
류 하드보일드란 말이 더 어울릴까.
박 일부러 필름누아르란 말을 안 쓰려고 하는 것도 비주얼에서 독특하지만 스타일이 두드러지지 않거든.
류 무기교의 기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전 반대 지점에서 누아르의 매력을 느껴요. 스타일리시한 거. 누아르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폼을 잡을 수 있잖아요. 예컨대 중절모 쓰고 권총을 들고 멋있게 서 있거나, 수많은 홍콩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고속으로 걸어다니고. 얼마 전 회고전 열린 스즈키 세이준 영화에서도 폼을 잡아서 멋있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데, 어떤 식이든 가능한 게 좋아요. 선악의 이분법을 흐리는 건 저도 좋아요. 말하자면 악한 놈이 더 악한 놈을 이기는 거죠. 아니면 질 수도 있고.
박 누가 덜 나쁘냐에 따라 주인공이 달라지지.
류 그러니까 서부극도 존 포드보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극이 더 좋아요. 누아르도 고전 누아르보다 홍콩 누아르에 더 영향을 받았어요. 홍콩 누아르가 허황되다고 하지만 주인공들이 대부분 범죄자이고 또 낙오자들이죠. <영웅본색>이나 <성항기병>처럼.
박 <피눈물>은 <영웅본색>보다 <성항기병>에 더 가깝지.
류 또 예전에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갱영화와 비교하면 다른 게 설교를 하지 않잖아. 악당 두목이 알고보니 간첩도 아니고. 한국에서 정통 장르영화가 생겨나기 힘들었던 게 가령 옛날 정통 액션이라는 영화만 해도 반공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거잖아요. 하다못해 동시대 일본의 야쿠자영화는 그 세계 안에서 정리가 되지만, 우리는 건달의 세계 안에서 정리되는 게 아니잖아요. 꼭 정치적인 어떤 게 들어오고.
박 맞아.
류 <제3부두 고슴도치> 같은 거 보면 두목이 꼭 간첩이야. 그런 점에서 <복수…>는 ‘정말 세다’, ‘짧다’는 느낌이에요. 미니멀하게 할 얘기만 딱 하는 게 좋았어요. 기교를 별로 안 부리는 대신에 엄청 극단적인 맛이 보이고. 박 감독님이 초반에 시나리오 보여주면서 익스트림 롱숏이랑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느닷없이 막 나와서 충격을 주고 싶다고 했는데 그게 정말 궁금해요.
박 드라이하게 가려고 굉장히 노력했지. 감상성을 없애려고. 난 장르영화를 보기는 좋아하고 만들기는 싫어하는데, 장르영화는 아주 순수한 유희정신이 있어야 하는 거 같아. 한국 감독이나 관객은 그런 것보다는 영화 바깥에서 뭔가를 끌어와야 좋아하지. 명분 좋아하고.
류 메시지 좋아하고, 전작과 비교하고. 우리는 장르영화에 대한 기반이 없어서 그런지 장르를 비트는 것 자체가 어려운 거 같아요.
박 비틀기 전이 뭔지 잘 모르니까 비틀어놔도 어떻게 달라진 건지 모르는 거지.
진지하게 얘기하다 삐꾸나는…
류 예를 들어 <킬리만자로>(오승욱 감독의 누아르영화)에서 관객이 저걸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몰라서 당황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칼을 팍 꼽는데 손이 미끄지는 바람에 피가 줄줄 나는 장면도 그랬어요. 순수하게 웃기려고 한 건데 저걸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른 의미가 있을 거야 하고 생각하느라 즐기지를 못하는 거죠.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 같은 영화도 만드는 사람들은 막 웃고 아싸 하면서 즐겁게 만들었는데, 관객은 무슨 의미가 있을 거야 하고. 그러면 갑갑하죠.
박 <복수…>에서도 웃기는 장면은 참 많은데 아무도 안 웃을 거 같아. 내가 좋아하는 게, 예컨대 <킬리만자로>처럼 굉장히 심각하게 가다가 그게 못 견딜 정도에서 삐딱하게 가면서 웃기는 건데. 그 영화에서 잘린 장면 중에 이런 게 있어. 박신양이 어느 범죄자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오승욱 감독이 미술감독이랑 컨셉을 이야기하는데, 이런 잡범의 방에는 10cm 위로는 아무것도 없을 거야, 대신 방 안에는 꼬깃꼬깃한 휴지, 그러니까 딸딸이에 쓴 휴지가 잔뜩 널려 있을 거다, 라는 게 미술 컨셉이었다는 거야. 한 인간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왕우(<외팔이 복서>를 만든 홍콩감독)를 동시에 좋아하면 저렇게 되는 거지.
일동 우하하.
류 B급영화에 필름누아르가 많아서 주류 정서와 약간 벗어난 게 특징이죠. 유머의 방식도 그렇고. 진지하게 도스토예프스키 이야기하다가 삐꾸나는 대사 하나 치는 식으로. 기본적으로 자세잡고 다니는 사람을 재수없어하는 정서라고 할까. 반대로 이런 걸 조롱할 수도 있고 극단으로 갈 수도 있고.
박 아주 극단적인 상황을 세팅해놓고 여기서 감상을 빼는 게 영화적으로 재밌잖아. 건조한 일상을 그려놓고 감상을 빼면 당연해서 재미없고, 반대로 극단적인 상황에서 막 펑펑 울고 음악 짠 하고 휘몰아치면 장식적으로 다가오고. 그런데 이 두 가지의 반대되는 게 만나면 영화적으로 더 강하고 새롭고 충격도 크지 않을까? 아이를 잃은 아버지가 술 마시며 괴로워하는 건 잠깐 지나가고 아주 무표정하게 마치 타고난 살인자처럼 행동하면.
류 기타노 다케시가 현실로 들어온 거죠. 사석에서 다시는 이런 작품 못 만들 거 같다고 그랬다는데.
박 솔직히 말하면 그래.
류 크∼, <벤허>의 윌리엄 와일러에 필적한 만한 말이군.
박 아니, 내가 걸작을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고. 내 능력의 한계 속에서 더이상은 잘 못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이야. 배우들이 좋고 또 제 역을 만났고. 지금까지 한 것에 비하면 가장 느슨하게 작업을 진행했는데, 잘 만들어야지 하는 욕심도 안 부리고 편안하게 했더니 그게 주효했던 거 같아. 야심없이. 작품에 대해서는 아주 만족해. 이게 걸작이라고 하는 건 아니잖아?
류 걸작이라는 거죠.
정재영에 대해 쓰지 않지?
박 요즘에 부쩍 누아르, 스릴러, 호러가 유행처럼 나오고 준비되는 이유가 감독이나 관객 취향이 예전처럼 질퍽거리는 걸 싫어하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쿨한 걸 좋아하잖아.
류 예전 사이클로 돌아가는 거 같아요. 요즘 80년대 정서를 가지고 오는 게 지금도 제작중이고. 30년 전 미국에서 이소룡 영화 붐이 일면서 흑인영화에 쿵후영화가 많았잖아요. 그게 주류 정서로 바뀌면서 <블레이드>나 <매트릭스>로 나타난 게 요즘 아닌가.
박 무당파 숭배하는 래퍼 우탕 클랜 있잖아, 죽이지 않아? 이런 친구가 메인스트림의 스타가 됐잖아. <블레이드>가 잘되는 것처럼.
류 <장군의 아들>이 잠깐 붐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액션영화가 주류가 된 적이 없었는데, 과거 60, 70년대처럼 액션영화가 주류로 진입하는 것 같고. 뭔가 큰 사이클이 한번 바뀐 것 같아.
박 <피눈물>은 한국에서 본격적인 액션영화니까, 잘 먹힐 것 같아. 정두홍(무술감독 겸 조연)씨가 독불과 싸우면서 마무리할 때 권투하는 거 흉내내잖아. 그거 권투선수 출신의 독불을 약올리는 거잖아. 액션이어도 무작정 치고 받는 게 아니라, 영화에 깔려 있는 걸 가지고 액션을 드라마로 만들어가는 게 장점인 것 같아.
류 예전에 무술영화에서 상대의 권법을 똑같이 해가지고 권법의 빈틈을 알아내는.
박 “너, 권투해? 그럼 권투로 상대해줄게” 하는 거지. 근데 <피눈물>에 대한 기사나 평에서 정재영에 대한 스페셜 멘션이 왜 없지. 왜 그런지 몰라. 우린 영화보고 정재영 이야기 무지 많이 했는데 글쓰는 사람들은 왜 안 그렇지?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류승완(이하 류) 김지운 감독이 던져준 말인데, 전 처음에 이런 식으로 생각했어요. 어둡고 축축한 뒷골목에서 고양이가 생선머리를 찾아 헤매는데 저쪽에서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또박또박 걸어오는….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고, 무겁지만 어둡지 않은. 박 경쾌의 경은 가벼울 경자 아니야? 류 어쩌다 말이 바뀔 때도 있어요. 어둡지만 무겁지 않은. (웃음) 박 내 말은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다는 말은 모순이다 이거지. 류 펄프누아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인데 뭐. 박 이건 말 된다. 빠르지만 가볍지 않은. <피눈물>은 빠르잖아. 가이 리치 영화(<록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스내치>)하고 비슷하기는 하지만 훨씬 처절해. 가이 리치는 영화를 산뜻하게 끝내잖아. 마돈나한테 장가간 남자와 강혜정(<피눈물>을 제작한 ‘좋은 영화사’의 기획실장)하고 결혼한 남자의 차이랄까. 류 ‘타란티노(<펄프픽션> <재키 브라운>)다’, ‘가이 리치다’, 이런 이야기 나오는 거 피하려고 굉장히 애썼는데, 그런 말들 많은 거 좀 억울해. 영향받은 걸 숨기겠다는 게 아니고, 극단적으로 몰아붙이고 네오갱스터나 최근 필름누아르의 냄새를 풍기는, 이를테면 고전적인 액션영화의 흥분은 없잖아요. 제 나름대로 퓨전 장르를 만들어내려고 한 건데. 박 맞아, 완전히 달라. 류 <공동경비구역 JSA>의 각본을 제가 썼으면 북한군 초소에서 총싸움하는 게 한 40분 걸렸을 거예요. 탈출하는 과정도 길고. 이렇게 취향이 비슷하고 영향받은 게 같더라도 다른 건데. 박 어디서 많이 본 것처럼 시작해서 살짝 다른 데로 빠져서 엉뚱하게 끝내는 영화가 상업영화를 하는, 중요한 작전 중 하나인 거 아닌가. 주인공이 다해서 몇명이야?

사진/ (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