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30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북카페에서 ‘마흔 토크’를 한 조영선씨, 정여울 작가, 이은정씨, 김영석씨(왼쪽부터).
김영석(이하 김) 이제 민방위 훈련 통지서를 받지 않으니 ‘나도 이제 40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방위 훈련받는 나이가 만 40살까지예요. 전쟁이 나도 나는 동원되지 않는구나 생각하니 상실감이 밀려왔어요. 그런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나를 찾는 소중한 시기이기도 했어요. 30대와 다른 삶을 살고 있거든요. 직장생활을 10년 하고 나왔어요. 결정적 계기가 있었죠. 어느 날 회식하고 집으로 가는 직장 상사의 뒷모습을 봤어요. 무척 쓸쓸했어요. ‘내가 직장에서 고속 승진을 하고 잘나가도 저 사람밖에 안 되겠구나. 그런 삶을 살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가슴속에 묻어둔 작가라는 꿈이 생각났어요. ‘내가 원하는 글 쓰는 삶을 살자’라며 사표를 냈어요. 일을 그만두고 그동안 써온 글을 모아 이북(전자책)으로 냈어요. 이은정(이하 이) 20대에는 젊은 에너지 때문인지 무서운 게 없고 뭐든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이제 마흔이 되니 두려운 게 많아요. 뭔가 공허하고 길을 잃은 느낌도 들고요. 난 언제쯤 편안해질까 그런 생각도 문득문득 드네요. 조영선(이하 조) 다른 분들 이야기를 들으니 ‘마흔이 다 같은 마흔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남편과 둘만 있으니 아이를 키우는 마흔과 또 다른 것 같아요. 우리는 단일하지 않고 나이로 규정할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진 첫 세대가 아닐까요. 내가 살아온 시간을 돌이켜보면 10대 때는 주변에서 강제한 삶을 살고, 20대 때는 그 강제한 것이 내면화돼 나 자신을 쥐고 흔들었어요. 혼란스러운 시절을 겪고 맞이한 마흔은 그동안 살아온 삶의 껍질을 벗는 단계 같아요. 정 마흔이 되면서 내가 행복한 순간을 발견했어요. 올해 내 책의 독자들과 유럽으로 글쓰기 여행을 갔어요. 그때 참여한 분들이 잠도 안 자고 글을 쓰는 나에게 힘들지 않냐고 했어요. 그 물음에 ‘글을 못 쓰면 더 힘들 것 같다’고 답했어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에요. 글 쓰는 게 내 블리스(더없는 행복)라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그 정도까지 좋아하는 줄 몰랐어요. 이 행복한 순간을 발견하면 무척 기쁠 것 같아요. 제가 삶이 허전하다고 느끼는 건 그걸 찾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20대 때부터 정치학을 공부하고 뒤늦게 박사 학위도 받았어요. 지금까지 정치학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이걸 좋아하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워요. 그것 말고 제가 행복한 순간은 강의를 할 때인 것 같아요. 학생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희열이 막 느껴져요. 강의하고 나오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정 은정씨는 정치학 공부보다 학생들과 교감 나누는 강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 지금 가장 큰 고민은 내가 즐거워하는 걸 찾을 수 있을까예요. 평생 못 찾으면 어떡하지 걱정되고요. 요즘엔 자신의 꿈을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부러워요. 아이를 낳아야 철든다? 정 명확한 척하는 사람도 많아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아닐 수도 있고요. 남들에게 잘 보이려 내가 아닌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진짜 내가 좋아한 게 뭘까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노력해요. 에고(의식적 자아)보다 셀프(내면적 자기)에 더 물을 주고 있어요. 셀프가 더 나다운 것이니까요. 조 의미로 감춰진 삶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해요. 아직도 그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김 확실히 저희 부모 세대와 다른 중년을 맞고 있는 것 같아요. 여자친구가 있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을 생각이에요. 부모가 되지 않은 중년이죠. 주변 제 또래는 아이 키우느라 정신없을 시기지만, 나는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 열심히 생각해요. 조 저도 부모가 되지 않은 중년이에요. 주변에서는 ‘아이를 낳아야 철든다’고 하지만 그 말은 맞지 않아요. 아이가 있느냐 없느냐가 성장의 요건은 아니죠. 자기 삶을 성찰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죠. 정 주변에서 받는 ‘피어 프레셔’(동료 집단이 주는 사회적 압력)가 많아요. 그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게 관건인 것 같아요. 인생에서 자기결정권을 갖는 게 중요해요. 내가 결정한 일이 실패하더라도 자신이 책임을 지는 능력도 키우고요. “난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두 번째 스물’ ‘두 번째 사춘기’라는 마흔이 되면서 어떤 변화를 느끼나요. 정 예전보다 글 쓸 때 자기 검열을 적게 하고 과감해졌어요. 부모님, 상처 등 사적인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써요. 마흔의 힘인 것 같아요. 내 상처,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독자도 자신에게 비슷한 고민이 있다고 말을 걸어와요. 이제 악성 댓글에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겼어요. 상처받을, 비판받을 용기가 생긴 거죠. 이게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치이고 비판을 받으며 얻은 거예요. 김 맞아요. 날 지키는 마음의 근육이 필요해요. 다들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잖아요. 그게 대부분 어린 시절에 생겨요. 그 어린 시절의 아픈 나를 마주할 수 있게 됐어요. 쉽게 꺼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던 그때의 나와 화해하고 손잡는 걸 하고 있어요. 마흔 이후부터요. 정 ‘내면 아이’(한 개인의 인생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존재)와 대화를 시작하는 거예요. 저도 그걸 하고 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왕따를 당했어요. 소심한 성격이 그때의 영향인 것 같아요. 담임선생님이 ‘일진’처럼 나를 괴롭히고 반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 괴롭혔어요. 부모님에게 이야기도 못했어요. 그땐 극단적 생각까지 했어요. 성인이 돼서도 왕따에 관한 기사를 보면 너무 슬프고 힘들었어요. 왕따당한 아이가 어릴 적 나 같아서요. 그런데도 남들에게 왕따당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어요. 그걸 망각한 거라 생각했는데 하나도 치유되지 않은 채 담아둔 거였죠. 그 상처를 이야기해야 치유가 되는 거였어요. 내면 아이와 이야기하면서 상처도 많이 치유됐어요. 조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어요. 학생들에게서 내 학창 시절 모습을 봐요. 친구들 사이의 질투, 편 가르기를 보며 ‘나도 그땐 그랬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땐 그런 친구들 관계 때문에 힘들어 죽을 것 같았거든요. 김 전 마흔이 되면서 좋아하는 것을 찾았어요. 난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우사 청소하는 봉사까지 하고 있어요. 냄새나는데도 할 만해요. 동물이 나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지만 동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존재 자체로 나에게 기쁨을 줘요. 예전부터 좋아하는 건 영화 보기예요. 다들 시네코아(1997년 개관해 2006년 폐관한 극장) 아세요? 거기 모니터링 회원이었어요. (웃음) 조 아, 시네코아! 정 30대도 잘 모르죠, 시네코아. 김 거기도 자주 가고 비디오방도 갔죠. 정 나도요. 대학원 시절 때까지 우울하면 비디오방에 갔어요. 김 나도 그랬어요. 비디오방에서 슬픈 영화를 보면 마음이 개운해졌어요. 이제는 비디오방 없어요. 멀티방이 생겼어요. 정 멀티방이라, 정감이 없네요. 우리가 가면 안 될 것 같고. 김 우리 진짜 40대 맞네요. 조 오, 동질감! (모두 웃음) 살아온 만큼이나 남아 있는 나머지 절반의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요. 정 앞으로 어떤 가치를 갖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난 니체의 사상 중 ‘아모르 파티’(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를 생각하며 살아갈 거예요. 불완전하고 좌충우돌하는 내 모습 그대로 사랑스럽고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게 아모르 파티 아닐까요. 김 예전에는 바다를 건너려면 배만 잘 만들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배를 띄우는 것도 물이요, 배를 뒤집는 것도 물이에요. 그 물을 제가 통제할 수 없었어요. 그 물처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을 탓하지 않고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마흔이 되니 그렇게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이제는 여유를 갖고 인생이라는 바다를 건너고 싶어요. 불완전하고 좌충우돌 그대로 ‘아모르 파티’ 이 그동안 ‘너무 예민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그 말을 제일 듣기 싫었어요. 내 단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예민한 나는 남을 배려하는 섬세함도 지니고 있거든요. 예민한 내 모습까지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게 인생인 것 같아요. 이제 그걸 시작했어요. 정 책 <마흔에 관하여>가 나온 뒤 처음으로 날 다독여주고 칭찬했어요. 예전에는 그런 걸 못했어요. 마흔 되니 그게 되네요. (웃음) 은정씨도 그 배려심으로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려 노력했잖아요. 그거 쉬운 일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잘해왔잖아요, 우리. 이제부터 아모르 파티를 시작해야죠! 사회·정리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중년의 마음을 기록한 에세이부터 문화인류학 분석서까지
마흔에게 권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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