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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젠 최면에서 깨어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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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3-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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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읽기 2 l 정치적 월드컵

독재정권 체제유지에 이용된 11회 대회… 경제 위기에 몰린 아르헨티나를 위하여

얼마 전에 끝난 동계올림픽은 역대 최악의 대회로 기억되리라 한다. 그렇다면 역대 최악의 월드컵은? 구구한 주장이 분분할 테지만, 1978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제11회 월드컵도 그 유력한 후보 명단에서 제외될 수 없을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그때 이사벨 페론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린 비델라 장군과 그 일당에 점거되어 있었다.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했고 셀 수 없이 많은 양심범이 옥에 갇혔다. 이처럼 흉포한 군사독재가 축구에 대해서, 또 축구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하는지는 우리도 겪어봐서 안다. 한 예로 비델라 정권은 ‘바라스 브라바스’(거친 녀석들)라는 아르헨티나판 훌리건들과 밀약을 맺고, 축구 대표팀이 해외 원정경기를 할 때 뒤쫓아가 현지에서 벌어지는 독재반대 시위를 폭력으로 제압하도록 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런 형편이었으니 월드컵에 쏟은 정성이야 오죽했으랴.


훌리건 동원해 시위대 폭력적 제압

사진/ 서독 월드컵 최고의 스타였던 요한 크루이프(오른쪽)는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불참했다. 이를 놓고 정치적 이유설 등이 제기됐다. (한겨레)
편파 판정과 뇌물 수수설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어쨌거나 아르헨티나는 우승을 차지했다. 마리오 켐페스라는 스타도 태어났다. 다만 이 빛나는 전과는 요한 크루이프, 베켄바워 같은 동시대 최고의 선수들이 빠진 상태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크루이프가 불참한 까닭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우세한 것은 당시 아르헨티나의 처참한 인권상황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는 해석이다. 그런가 하면 안전을 염려한 부인의 만류, 혹은 네덜란드축구협회와의 갈등 때문이라는 풀이도 나왔다. 이유를 어디서 찾든, 74년 서독대회에서 선보인 크루이프의 기량을 월드컵 무대에서 두번 다시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지금껏 축구팬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크루이프의 예는 자기의 피땀어린 노력이 인간에 대한 모욕에 속절없이 이용될 가능성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라는, 스포츠에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물음을 새삼 떠올려준다. 이 해묵은 물음에 간단히 대답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사악한 의도에 이용될 빌미를 아예 주지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물론 옳다. 그러나 이렇다할 저항없이 경기에 참여한 선수와 관중을 덮어놓고 탄핵하는 일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 야만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이용’당하는 한편에서 또다른 미지의 가능성이 싹트고 있을지 모른다는 점에 미리부터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다. 축구는 국가주의의 화신이자 대중의 아편일 수 있지만, 그것들을 배설하고 정화하는 통로이거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지평을 넘겨다보는 발판일 수도 있다.

망각의 도구인가, 기회의 보고인가

예컨대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 예프투셴코의 소설 <죽을 때까지 죽지 않으리>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뒤의 가능성이다.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킨 1991년의 군부 쿠데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왕년에 소련 축구대표선수였으나 주정뱅이로 영락한 인물이 다른 주인공들과 더불어 쿠데타에 맞서 시민 저항에 나서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다. 그런 그의 발걸음 위로 선수 시절의 크고 작은 일화에 대한 회상이 겹쳐진다. 그 회상은 장려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를 거느리고 있지 않다. 대신에 이 소설에서 축구는 있어야 할 현실을 암시하는 ‘자유의 흔적’이자 어떤 슬픔과 고난에도 시들지 않는 생명력의 은유로 나타난다.

러시아에 못지않은 어려움이 요즘 아르헨티나에 닥쳤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번 한·일월드컵이 아르헨티나인들에게 현실의 비참을 망각시키는 구실을 할지, 더 나은 현실을 열어젖히는 의미있는 기회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여기서 슬기로운 선택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마라도나와 체 게바라의 나라에게 우리가 품어 마땅한 우정어린 기대이다.

손경목/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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