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언제는 라면 먹자 꾀더니만, 어느 순간부터 불어터진 라면 취급이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에서 멀대 같은 영우는 청승맞다. 언제 균형에 균열이 생겼는지 알 길이 없다. 느닷없이 여름이 와버렸다. 기다림은 ‘약자’인 영우의 몫이다. 이불 위에 누워 오지 않는 전화를 붙들고 있는 영우는 무력하다. 폴더폰을 폈다 접었다 폈다 접었다, 고통은 그의 몫이다. 무슨 이런 불공평한 게임이 다 있나. 영우는 피해자일까? 그 아슬아슬한 균형은 별별 것으로도 깨진다. 일단 기울어지면 가속도가 붙는다. 을은 더 애간장이 타고, 갑은 뜨거워 뒤로 물러나고, 그러기에 을은 더더욱 애간장이 타고,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또 타고…. 열정을 투자할수록 더 약자가 되고, 약자가 될수록 더 투자하게 되는, 무슨 이런 치사한 게임이 다 있나. 델리스 딘이 쓴 <열정의 덫>(원제 The Passion Trap)은 균형이 깨진 관계 개선용 처방전이다. ‘밀당’의 기술이 아니다. 밀당한답시고 전화를 부러 늦게 받고, 답장을 부러 안 하고, 관심 없는 ‘척’하면 할수록, 그 ‘척’하는 데 에너지가 드니 ‘약자’의 불안은 더 커진다. 균형을 찾는 방법은 관계의 약자가 상대에게 쏟는 에너지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 스스로 서는 것밖에 없다. 해봐라, 되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방법이 없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당신에게 나는 무슨 의미야가 아니라 나는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내 가치를 타인이 아니라 내게 묻는 방법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 버티고 서야 ‘건강한 거리’가 생긴다고 저자는 말한다. 궁극의 목표는 관계의 유지가 아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건 ‘나’로 버텨보아야 하는 까닭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다. <봄날은 간다>의 멀대 같은 상우는 ‘피해자’일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상우 한 사람이다. 덧없이 가버리는 순간들을 바라보며 우는 이는 상우이고, 평생 남편을 그리다 숨진 할머니를 이해하는 이도 상우이고, 마지막, 억새밭에서 두 팔을 벌리고 눈 감은 채 바람을 만끽하는 이도 상우다.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에 대해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상처받은 사람은 그것의 구조와 원인, 역사를 규명하려 한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쪽은 언제나 ‘약자’이거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크기, 깊이를 깨닫는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함해 모든 대화는 최음제이며, 인생에서 깨달음만 한 오르가슴은 없다. 상처와 고통은 그 쾌락과 배움에 대해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다. 사랑보다 더 진한 배움을 주는 것이 삶에 또 있을까. 사랑받는 사람은 배우지 않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상처가 클수록 더 넓고 깊은 세상과 만난다.”(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사실, 이 모든 게 뇌의 장난일지도 모른다. “중독은 모두 도파민 수치의 증가와 관련 있다. 그렇다면 낭만적인 사랑도 중독이란 말인가? 그렇다.”(헬렌 피셔, <연애본능>) 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금주와 똑같은 이별 매뉴얼을 들려준다. 단 한 잔도 안 되는 것처럼, 단 한 통화도 안 된다. 뇌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달리고 명상하고 이야기하라고 한다. 사랑받는 사람은 누릴 수 없는 것 동네 복지관 요가학원에서 다리를 찢으며 구시렁거린다. ‘중독도 아주 더러운 중독.’ 이 중독은 나에게 다가가는 가장 험난하고 가까운 길이다. 그 밟지 않을 수 없는 진흙탕을 건너며, 볼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조금 보았다. 울퉁불퉁, 엉기성기, 뒤죽박죽, 그래도 나인 나, 그런 나의 결핍과 소망들 말이다. “사랑의 임무는 다른 방식으로는 잡히지 않는 인간 생활의 주파수를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입니다. 흥겨운 주파수도 있고 슬프거나 외로운 주파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주파수와 맞아떨어지면 우리의 정서적 지평이 넓어진다는 사실입니다.”(마리 루티, <하버드 사랑학 수업>)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약자가 되길 자처하며, 바닥으로 떨어질지라도, 연애의 평균대 위에 오르나보다. 그 위에 서 있으려면 다리 근육을 키우는 수밖에, 서 있다보면 억새밭을 스쳐 내 몸을 채우는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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