❶ 1950년 12월19일 한 한국인 가족이 유엔군을 소개하는 배를 타기 위해 함경남도 흥남 해변에서 기다리고 있다. 강성현 제공 강성현 제공
❷ 흥남 해변에 있는 한국인 주민들이 수송선 LST 845로 소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강성현 제공 강성현 제공
국군 수뇌부들이 “북한 겨레”에 대한 “동포애의 발로”로 이 숭고한 일을 했다고 자임하는 것도 참 흥미롭다. 이런 일화에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과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 제3사단장 최석 준장 등 주로 장군들이 등장한다. (영관급 참모도 몇몇 있지만 잘 주목받지 못한다.)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소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 과장된 자랑은 절정에 이른다. 정일권은 당시 흥남에 없었지만, 보고받거나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피란민 소개와 관련한 이들의 역할과 공로를 보증해주는 스피커가 된다. 심지어 너무 몰입한 나머지 배에 타지 못한 “북한 겨레” 피란민들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깊이 느끼고 참모총장을 사임하려 했다 밝힌다. 난 김백일과 송요찬의 북한 주민에 대한 동포애를 서술하는 정일권의 회고에 한참 생각이 머물렀다. 이들은 1948년 10월 이후 전남 여수·순천과 제주에서 상당수의 지역주민을, 민간인을,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던 지휘관이다. 이런 자들이 흥남에 모여든 북한 피란민들에게 “동포애로 뜨겁게 달아”올랐다는 거다. 전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이들의 인식에 피란민들은 “국군이 북진 깃발을 휘날리던 때 열광적으로 환영에 나섰던 사람들”이고 “태극기 흔들며 좋아했던” “노인과 아이들, 아낙네들, 여학생들”이기 때문에 북한 당국에 “반동으로 몰릴” 사람들이다. 헌법에 뭐라 쓰였든, 남한에 있든 북한에 있든, ‘빨갱이’는 죽여야만 하고 ‘빨갱이’와 싸우고 자신들을 환영하면 그게 민족·겨레·동포인 거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국민인 거다. 함흥과 흥남으로 들어온 20만~40만 명은 반공 ‘자유 피란민’인 거다. 자유 피란민을 보호하고 다 배에 태워야 하는데,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과 그의 참모들이 이에 냉담하니 김백일과 송요찬은 얼마나 분통 터졌을까? 송요찬의 말은 강렬하다 못해 섬뜩하다. “우리가(김백일 군단장과 나는) 이들을 버리고 가느니보다는 차라리 우리 총으로 쏴 죽이는 게 낫다고 주장했어요. 어차피 공산군의 손에 죽을 테니까요. 최후적으로 우리 국군은 육로로 퇴각할 테니 우리를 수송할 선박에 피란민을 태워달라고 간청하기도 했어요.”(<민족의 증언> 제4권 78쪽) 사랑하니까 죽이겠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12월19일 북에 없었던 흥남 철수 주역들 이들의 말과 행적을 관련 공식 문서들과 비교해가며 추적할수록 여러 의문이 꼬리를 문다. 이들은 언제까지 흥남에 남아서 피란민 소개를 위해 갖은 애를 썼을까? 항상 나오는 일화가 12월19일 국군 제1군단 사령부에서 열렸다는 피란민대책회의다. 정일권의 회고에서 나온다. 정일권이 장군들의 발언을 옆에서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서술된다. 내용을 압축하면 이런 거다. 김백일·송요찬·최석 장군이 하나같이 피란민들을 데려가는 것이 국군의 사명이라는 결의를 밝히자 이에 알몬드 장군이 크게 감동받아 “훌륭하고 아름다운 겨레 사랑”에 최대한 협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30대에 육군 최고지휘관 자리에 올랐고 최장수 국무총리도 한 정일권이었지만, 각색에는 영 소질이 없었나보다. 진짜 12월19일에 대책회의가 열리기나 했을까? 분명한 건 송요찬의 수도사단은 12월16일 흥남에서 철수하기 시작해 18일 오후 강원도 묵호항에 상륙했다. 김백일의 제1군단도 12월17일 철수해 이후 강원도 삼척으로 갔다. 최석의 3사단은 그보다 일찍 함경북도 성진에서 부산으로 철수했고, 흥남으로 들어온 일부 부대도 철수했던 차다. 그렇다면 국군 제1군단과 사단 지휘관, 참모들은 자기 부대를 먼저 보내고 피란민 소개의 사명을 위해 흥남에 계속 남았다는 말인가? 12월19일은 피란민들이 본격적으로 배에 타기 시작한 날이다. 그때 피란민들은 김백일과 송요찬을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두 장군의 자취를 찾을 수나 있었을까? 피란민 옆에 장군들은 없었지만, 대신 현봉학이 있었다. 미 제10군단 통역관이자 민사부 담당 고문관이던 그는 함흥이 고향이었고, 기독교인, 미국 유학파 의사(수련의)였다. 그는 자신만 바라보는 고향의 기독교인과 “반공 인사”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한다. 이들을 구원하려면 알몬드 장군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나 장군의 입장은 완고했다. 군 전력을 최대한 보전하고 모든 병력과 군수품의 철수를 지휘하는 처지에서 보면, 피란민 소개는 이를 명백히 방해하는 요소로만 여겨졌다. 군 병력과 군수품의 이동을 방해하고, 무엇보다 피란민 대열에 “제오열(반대 세력) 및 불순분자”가 침투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알몬드 장군뿐 아니라 참모들 사이에 팽배했다. 군은 언제나 민사를 군사작전에 종속시킨다. 이렇게 생각하는 미군 사령관과 참모들을 향해 현봉학이 “함흥과 흥남의 이십만 민간인이 어디로 피란을 갈 수 있겠느냐고, 적들이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있는 마당에 갈 곳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하소연”했던 것이 통했다고 보는 건 정말 순진한 믿음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노력이 무의미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12월9일 알몬드 장군이 제10군단 민사부장과 함께 현봉학을 불렀고, 그 자리에서 기독교인과 유엔군에 협력했던 민간인 4천~5천 명의 소개와 철수를 지시했으며, 이 일을 현봉학 등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알몬드 장군과 그의 참모들이 피란민을 소개하기로 한 결정에 작용했던 배경과 힘들, ‘작전’ 과정에 대해 이제 반공 신화에서 역사 영역으로 가져와 실증적으로 엄밀하게 확인해야 한다. 알몬드와 현봉학의 역할
❸ 북한 피란민들이 흥남에서 소개하기 위해 물에 뜨는 것이라면 다 활용하고 있다. 부두에 수송선 LST와 고기잡이배로 가득 차 있다. 강성현 제공
독자 퍼스트 언론, <한겨레21>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