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의 연인>, 문학동네 펴냄.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운다. 엄마 자궁안에서의 평안과 행복을 잃어버렸기에 그것을 다시 찾으려고 운다. 엄마 젖을 먹으면 잠시 울음을 그치지만 다시 운다. 마치 이렇게 말하려는 듯.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 더 궁극적인 만족을 다오. 자라면서 그는 궁극적으로 만족할 무엇을 욕망하며 이따금 그것을 성취하는 것 같다. 그러나 손에 쥔 그것은 오래지 않아 누추한 민낯을 드러내며 악마처럼 속삭인다. 나는 네가 바라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끔찍한 허무가 따른다. 이후 그는 다른 것을 욕망하고 성취하지만 곧이어 환멸한다. 궁극적인 만족을 찾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고 그 짝퉁들을 향해 욕망과 환멸을 무한 반복하는 것이 인생이다. P가 알코올과 불가능한 프로젝트에 빠져든 것도, 완이 대학 입학 뒤 실망스럽고 우울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많은 신입생이 대학생활의 참을 수 없는 시시함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것은 대학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문제다. 이루어진 꿈은 환멸을 불러내기 마련이다. 대학 신입생만 허무한 것도 아니다. 오매불망 사귀고 싶었던 이성과 첫 데이트를 하고 난 사람, 간난신고 끝에 취직한 사람, 자식의 장성만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자식을 품 안에서 떠나보낸 사람 모두 허무하다. 가짜 꿈을 좇아 여기까지 허무감으로 괴로운 청년에게 늘 새로운 꿈을 꾸라고 조언하는 것이 잘 알려진 답이다. 그러나 나는 원래 삶이 슬픈 것이니 그 슬픔을 껴안으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삶도 인간의 본질적 고통을 피해 갈 수 없다. 불가피한 고통에 맞서려면 달콤한 거짓말로 고통 앞에서 눈감기보다 고통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와 더불어 사는 편이 낫다. 고통을 병이 아닌 자연스러운것으로 수용해야 괴롭지 않다. 허무가 예외적 재난이 아니라 보편적 감정임을 알고, 담담하게 적응하는 게 좋다. 일평생 P를 향한 질투로 괴로워했던 “나”. P의 몰락을 확인한 그는 승리감에 도취하기는커녕 공황에 빠진다. P를 만난 사실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다. 그는 P를 이기고 싶은 욕망 하나로 살아왔다. P가 무너지자 목표가 사라진다. 지향점을 잃은 사람은 위태롭다. 그가 공황에 빠진 이유는 제 욕망의 본질을 간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감독으로 성공하고 싶었던 욕망은 그 자신에게서 생겨나지 않았다. 그는 진실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P를 이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욕망은 P로부터 생겨난 가짜였다. 평생 그를 끌어온 힘이 가짜였으니, 정신은 붕괴하고 만다. 욕망은 사는 힘을 주지만, 종종 타인으로부터 오염된다. 한 예로 우리는 무엇을 진실로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흉내 내서 소망한다. 명문대를 꿈꾸는 사람은 명문대생이 아니기에, 명문대의 본색을 모른다. 그는 명문대가 왜 좋은지 알아서 꿈꾸는 게 아니다. 단지 소문 때문이다. 남들이 좋다고 이야기하며 명문대를 꿈꾸니까 남들을 따라서 명문대를 꿈꾼다. 청년은 간혹 지나친 욕망으로 스스로를 망친다. 1등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을 들볶다가, 원대로 되지 않을 때 우울증에 빠진다. 그녀와 꼭 사귀고 싶은데 여의치 않을 때 스토커가 되기도 한다. 이루지 못한 욕망은 청년의 우울증을 일으키는 주범이다. 욕망과 거리를 두지 못할 때 이런 비극을 초래한다. 지나친 욕망으로 괴로운 청년은 자문해보자.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인가? 남들로부터 이식된 것인가? 만일 욕망이 타인에게서 생겨났음을 알게 된다면 욕망의 지나침에 제동을 걸 수 있다. 내가 진짜로 바라지 않았던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결핍, 기적 같은 힘의 근원 마치 백야처럼, P의 삶에는 어둠이 없었고 끝없는 빛만 이어졌다. 그는 “그림자를 찾고 싶어”서 알코올에 빠지고 불가능한 꿈을 꾸었다. 어두운 밤 혹은 결핍이 없었기에 몰락한 셈이다. <절규>로 유명한 화가 뭉크는 “가족력이었던 폐결핵에 대한 공포, 이상성격자였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끊임없었던 정신병력” 때문에 평생 고통받았다. 거듭된 불행으로 일찍 자살하리라는 세간의 예측과 달리, 그는 팔십까지 살았다. “가혹한 현실이 오히려 그를 붙들어주었”던 것이다. 불행이 오래 살아갈 힘을 주었다. 힘은 결핍에서 나온다. 기적 같은 지혜와 에너지를 만나는 축복은 고난의 한가운데서 찾아온다. <서경>에 따르면, 군자는 무일(無逸), 즉 ‘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끊임없이 불편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어부들은 정어리를 저장할 때 천적인 메기를 함께 넣는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 때문에 정어리가 더 오래 살기 때문이다. 청년은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불행하다. 가난하고 명석하지 못하며 예쁘지 않아서 울적하다. 하나 그는 바로 ‘못 가진 것’ 덕분에 늘 깨어 있고 절실하게 열정을 불태울 수 있다. 결핍은 삶에 힘을 보태주는 비타민인 셈이다. 박수현 문학평론가·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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