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아 필립에게 “자기 뜻대로 살고 싶은 것이 당장의 절실한 소망이었다”. 그에게는 화가의 꿈이 아니라 어른들을 누르고 자기 의지대로 산다는 이미지가 중요했다. 화가의 꿈은 일종의 포즈였다. 또 진정 필립을 매혹했던 것은 예술이 아니라, “로맨스와 아름다움”이라는 환상을 거느린 보헤미안 라이프스타일이었다. 그는 꿈의 본질보다는 그 둘레의 광휘에 더 끌렸던 것이다. 필립은 어른들의 압제라는 굴레를 벗고 자기 의지를 따랐지만, 자기 의지조차 굴레였다. 어른들의 억압을 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명령은 청년을 사로잡는다. 이 명령의 전제는 자기 의지에 대한 순결한 존중이다. 그런데 자기 의지는 이따금 환상에 불과하다. 누군가를 이기고 싶은 욕망, 모종의 자기 이미지를 연출하고픈 욕망 등 각종 불순물로 오염된다. 이를 발견한 청년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을 떠났던 연은 서른 즈음 비참했다. 재능과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없었다. 무수한 우연과 책략이 필요했다. 가난은 끔찍했다. 성공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순수하지는 않았다. 저 역시 성공에의 속물적 욕망을 지녔음을 인정하자 참혹했다. 무엇보다 자기 꿈이 오염됐음을 깨달았다. 실은 작가가 아니라 남들과 다르게, 불꽃처럼 산다는 이미지를 꿈꾼 것 같았다. 연은 자기 꿈에 기만당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절망하는 청년에게 “남의 충고에 따라 옳은 일을 하여 얻는 것보다 스스로 애쓰다 잘못한 실수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필립의 말이 위로가 될까. 환멸했다 하더라도 꿈꾸었기에 소중한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인간은 환멸하는 만큼 배운다. 하나 본질적으로, 모든 꿈은 신기루다. 어른들로부터 주입된 꿈이든 스스로 찾은 꿈이든, 끝이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환멸은 어른들에게 순종한 청년이나 반항한 청년이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서른 즈음 정은 무의미한 일의 반복에 불과한 일상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정이나 연이나 환멸의 크기에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토록 서글픈 삶의 허망함에서 우리는 구원을 발견한다. 삶은 무의미하다, 고로 나는 자유롭다 친구 헤이워드의 죽음을 계기로 필립은 삶의 처절한 무의미를 깨닫는다. 과거 필립은 헤이워드의 놀라운 지성에 열광했으나, 언젠가부터 실망했다. 필립은 종교, 사랑, 예술에 열렬히 환호했으나 결국 모든 것이 굴레였음을 발견하고 환멸했다. 만물은 변하고 흐른다. 영원한 것도 절대적인 것도 없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헤이워드의 삶은 허망했다. 무언가를 이룬 삶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은 “맹목적인 우연의 무력한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파도는 나를 나도 모르는 곳에 데려다 놓는다. 사람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인생에서는 어느 것에도 이유나 까닭이 없”다. 하여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사람의 삶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필립은 늘 삶의 의미를 찾았으나 이제 의미를 구하는 일조차 굴레임을 깨닫는다. 삶의 의미라는 거대한 굴레를 벗자 놀라운 자유를 만난다. 삶이 무의미하다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다르지 않기에, 행복과 불행에 연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주 짧은 순간, 지구의 표면을 점유하고 있는 바글대는 인간 집단 가운데 아주 하찮은 생물에 지나지 않”는 사람에게 행불행이 얼마나 다르겠는가. 삶의 무의미를 인정해야 불행을 불평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필립은 행복을 얻고 싶은 욕망을 버림으로써 그의 마지막 미망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행복을 포기해야 행복하다는 아이러니는 놀랍게도 진실이다. 인간의 굴레 중 벗기 어려운 것이 자존심이다. 많은 분쟁이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발생한다. 자존심에 상처받았기에 공격한 사람을 증오하며, 상처받을까봐 두려워서 미리 공격한다. 무의미를 깨달은 필립은 어지간한 공격에 상처받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의 불구를 공격하는 사람에게도 분노하지 않는다. 불구인 발은 오랜 트라우마였으니, 놀라운 변화다. 행불행의 경계가 없기에 고통은 불행이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무늬다. 그는 고통마저 삶의 일부로 즐겁게 수용한다.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소망도 굴레다. 필립은 스페인과 동방 여행을 꿈꾸면서 나날을 견뎠다. 여행을 떠나면 “삶의 신비를 깨우치는 무슨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샐리의 임신을 예견하자 결혼을 위해 여행의 꿈을 버린다. 소망을 이루는 것과 포기하는 것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청년은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를 뚜렷이 구별한다. 하여 불행과 실패 때문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행불행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면 불행이라 여겼던 것들이 불행이 아님을 알게 되고, 덜 슬퍼하게 된다. 고통에서도 빛과 에너지를 발견하며, 주어진 삶의 조건을 하나하나 기껍게 수용할 수 있다. ‘차이 없음’에 대한 발견은 연을 나락에서 구해냈다. 자본주의적 강령에 충실했던 정이나 다른 꿈을 꾸었던 연이나 삶의 무게와 슬픔은 다르지 않았다. 연은 익숙했던 행복의 척도 대신 새로운 척도를 만들어서 절망을 이겨냈고 훗날 괜찮은 작가가 되었다. 박수현 문학평론가·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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