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태의 ‘주제가’를 만든 조선족 3세 로커 최건 방한
‘중국 록의 황제’, ‘중국 젊은이들의 정신적 지주’, ‘음악으로 개혁을 꿈꾸는 혁명주의자’, ‘천안문 사태의 상징’. 이제 갓 40살이 넘은 조선족 3세 로커 최건을 둘러싼 수많은 수식어다. 그가 3월1∼2일 열린 화류콘서트에 참여하기 위해 2월28일 한국에 왔다. 지난 1997년에 이은 두 번째 방한이다.
민감한 정치문제에 도전
그는 1961년 조선족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군악대 트럼펫 주자였던 아버지에게서 트럼펫을 배우면서 음악에 눈뜨기 시작했다. 1978년에 베이징 교향악단에 입단해 트럼펫 주자로 활약하던 그는 1980년대 초부터 외국 유학생들과 관광객에게 얻어들은 록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사이먼앤가펑클, 존 덴버를 좋아했던 그는 이때부터 기타를 배우며 클럽 등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꾸준히 인기를 끌어오던 그는 1986년 5월 베이징 노동자 스타디움에서 열린 세계 평화의 해 기념공연에 100여명의 전세계 아티스트들과 함께 출연하면서 중국 전토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89년 그는 첫 앨범 <일무소유>(一無所有)를 발표한다. 폐쇄적인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막막한 미래에 괴로워하던 중국의 젊은이들은 이 노래에 열광했고 이 앨범은 1천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게 된다.
특히 그가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1989년 이른바 ‘천안문 사태’다. 당시 시위대가 <일무소유>를 시위의 주제음악으로 쓴 것이다. 최건 또한 시위에 계속 참여해 시위대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뒤 중국 당국의 제한 속에서도 천안문 사태를 노래한 앨범 <해결> <붉은 기 아래의 알> 등 여전히 민감한 정치문제들에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는 음악을 발표하고 있으며 <북경잡종> 등 영화에도 출연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일무소유>를 발표하던 때의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에는 문화대혁명의 공포가 가시지 않은 때였다. 당시의 노래들은 인민들의 현실에 눈감은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노래들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음악은 인간의 감정과 현재 사회현실을 있는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는 “나의 느낀 점을 솔직히 음악으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정치적·사회적 목표를 음악으로 이루려는 가수”로 보는 시작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 최건’으로 보지 말라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을 조선족 출신 ‘한핏줄’이라며 과도한 지지를 보내는 것도 경계했다. “중국은 56개 민족의 대가정이다. 음악에서 국경과 민족의 경계는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아버지 최웅제씨는 엄격한 민족주의 교육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런 교육에 반발했고, 자신은 ‘자유로운 이성을 가진 한 개인’이라는 것에 중심을 둬왔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당시에 어린 시절을 보낸 바람에 한국말도 거의 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서 ‘한국인 최건’을 바라는 것은 무리로 보였다. 그는 ‘자유로운 한 개인으로서의 최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의 음악에 흐르는 한국적인 정서는 숨기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조선족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 음악에 한국적인 면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한국 사람들에게 내 음악을 많이 알렸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그는 공연 뒤 3월9일 미국 공연을 위해 떠날 예정이지만 “앞으로 한국에서 음악활동을 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며 아쉬움을 달랬다. 이형섭 기자/ 한겨레 문화부 sublee@hani.co.kr

특히 그가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1989년 이른바 ‘천안문 사태’다. 당시 시위대가 <일무소유>를 시위의 주제음악으로 쓴 것이다. 최건 또한 시위에 계속 참여해 시위대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뒤 중국 당국의 제한 속에서도 천안문 사태를 노래한 앨범 <해결> <붉은 기 아래의 알> 등 여전히 민감한 정치문제들에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는 음악을 발표하고 있으며 <북경잡종> 등 영화에도 출연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일무소유>를 발표하던 때의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에는 문화대혁명의 공포가 가시지 않은 때였다. 당시의 노래들은 인민들의 현실에 눈감은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노래들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음악은 인간의 감정과 현재 사회현실을 있는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는 “나의 느낀 점을 솔직히 음악으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정치적·사회적 목표를 음악으로 이루려는 가수”로 보는 시작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 최건’으로 보지 말라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을 조선족 출신 ‘한핏줄’이라며 과도한 지지를 보내는 것도 경계했다. “중국은 56개 민족의 대가정이다. 음악에서 국경과 민족의 경계는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아버지 최웅제씨는 엄격한 민족주의 교육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런 교육에 반발했고, 자신은 ‘자유로운 이성을 가진 한 개인’이라는 것에 중심을 둬왔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당시에 어린 시절을 보낸 바람에 한국말도 거의 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서 ‘한국인 최건’을 바라는 것은 무리로 보였다. 그는 ‘자유로운 한 개인으로서의 최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의 음악에 흐르는 한국적인 정서는 숨기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조선족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 음악에 한국적인 면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한국 사람들에게 내 음악을 많이 알렸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그는 공연 뒤 3월9일 미국 공연을 위해 떠날 예정이지만 “앞으로 한국에서 음악활동을 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며 아쉬움을 달랬다. 이형섭 기자/ 한겨레 문화부 suble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