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누구의 언어로 묻는가 2차로 자리를 옮기는 중에 친구에게 택시 타고 집에 가라고 귀띔한 사람은 상대 회사 여사원이었다. 친구는 그날 밤새 울며 고민하다 다음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사회생활 하다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 말이 절망스럽더라고. 문제제기를 한다면 어땠을까? 그 손이 내 옷 속에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이 있을까? 봤다고 누가 증언해줄까? 왜 러브샷을 했냐고, 너도 좋아서 한 거 아니냐고 하지 않을까? 내가 너무 사소한 일로 분란을 일으키는 건 아닐까? 성폭행을 당한 것도 아닌데 이런 일로 문제를 일으켜도 될까?” 그 콜라텍에서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브래지어 끈 만진 것뿐인데, 이런 일로 정색하면 관계가 어색해질 텐데, 나한테 잘해주는 대표인데, 원래는 좋은 사람인데.’ 그 ‘사소한 일’에 아무 말도 못했던 나를 20년 동안 용서하지 못했다. 우리가 스스로 했던 그 생각들은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왜 ‘그들’의 언어를 기준으로 자신을 의심했을까? 네 감정이 정말 ‘객관적’으로 발언해도 될 만한 것일까? 그 ‘객관’의 언어는 누가 정하는 걸까? 왜 익숙한 폭력은 응당 견뎌야만 하는 폭력으로 여겨질까? 위력의 행사? 피해자인 내가 가해자인 그를 스스로 변호할 정도로, 피해자인 내 친구가 가해자 앞에서 입도 뻥끗할 수 없었을 정도로, 자신이 인간이 아닌 살덩어리로 다뤄지는 모멸을 느끼면서도 ‘사소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스스로 기만하고 자괴감을 짊어질 정도로, 우리는 위력이 행사되는 공간에 산다. 왜 어떤 말은 더 믿기 쉬운가? 익숙한 것은 더 믿기 쉽다. 익숙한 것 뒤에는 침묵당한 목소리가 있다. 안희정 전 지사 1심 판결을 보니,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왜 새벽에 담배를 사다 문고리에 걸어두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는지” 묻는다. 왜 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피해자가 새벽에 담배 심부름을 거부할 수 있었다면, 문고리에 걸어두고 “가져가시라” 문자를 보낼 수 있었다면, 싫은 걸 싫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위력이 행사”되는 관계가 아니라는 증거일 수 있겠다. 위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굳이 협박할 필요가 없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위력은 있지만 평상시에 위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고 판단했는데, 새벽에 담배·맥주 심부름까지 문자로 그것도 한 단어로 시키고, 상대는 바로 대령하는 상황이 위력 행사가 아니라면 애정의 행사로 보이는가? 어떻게 해야 위력을 행사하는 것일까? 왜 위력에 이토록 관대할까? ‘당연히’ 하는 일이기에 위력 행사가 아닌 게 아니라, 위력의 ‘당연한’ 행사 아닌가. 자괴감은 이제 그만 지난 8월25일 ‘헌법 앞 성평등’이 주최하는 ‘그들만의 헌법’ 집회에 갔다. 환장하게 덥던 여름이 언제인가 싶게 초가을 바람이 불었다.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시위대엔 남자도 여자도 있었다. 나는 시위대 사이에 끼지 못하고 1m쯤 떨어진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구호를 기어드는 목소리로 따라 했다. 그들의 당당함이 눈부셨다. “‘피해자 따위’는 아니야”라고 나를 속였던 내가 부끄러웠다. 자괴감은 이제 그만 됐다. 어쩌면 상처받은 사람은 축복받은 자다. 상처는 새로운 시각을, 타인을 향한 문을 열어준다. “반대로 억압받는 자의 시각에서 기존 사회를 보면, 이들의 타자성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지성을 가능하게 하는 자원이 된다.”(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또 “사람들은 모두 편견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편견을 이해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할지 알게 된다.”(앤드루 솔로몬, <부모와 다른 아이들>) 그 노을에 반짝이는 상처와 분노를 보고 있자니, “이제 여자들이랑은 같이 일 못하겠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일을 할 수 없는 세상이 올 것 같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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