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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동지여, 당신을 용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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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2-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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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옥중에 갇힌 전 <말> 기자 김경환씨의 새로운 비상

그는 소를 닮았다. 큰 눈 끔벅이며 땅을 갈 때는 선한 황소이고, 가쁘게 날숨들숨 쉬며 수레를 끌 때는 고단한 물소이고, 온몸을 당겨 젖을 낼 때는 소중한 젖소이고, 폭풍우 치는 들판을 내달릴 때는 거친 들소이다.

99년 가을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김경환(38) 전 <말> 기자가 옥중 서한집을 냈다. ‘안동교도소 3000번’인 국가보안법 위반 정치범이 세상과 교신할 수 있는 수단은 단 두 가지이다. 누군가 자신을 찾거나, 누군가를 향해 편지를 쓰는 것. 그는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편지쓰기를 택해 세상이 그를 찾기 전에 세상의 문을 먼저 두드렸다. 그의 글을 읽는 것은 황소와 물소와 젖소와 들소의 생명력과 꼭 그만큼의 삶의 힘겨움을 나눠지는 일이다.

반성문 쓰고 풀려난 ‘총책’


감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많다. 봄기운에 붕붕 떠 자리에서 일어나고 우레 같은 박수소리로 아침을 연다. 몇 발자국 안 되는 이등변삼각형의 운동장을 달리며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는다. 소지간에서 사소들과 함께 보리밥을 먹은 뒤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본다. 찐고구마를 아껴먹고 땅콩을 까서 비둘기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다. 추운 날에는 창문을 열어 젖히고 더운 날에는 땀을 흘리며 앉았다 섰다 운동 한다. 또 있다.

가뭄에 흩뿌리는 몇 방울의 비는 더 큰 절망을 주는 거짓 희망임을 알게 되고, 천천히 걸어야만 가까운 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집단의 일심단결에 매달리는 것은 나약함의 또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고, 불과 칼의 운동이 아니라 물과 바람의 운동이 역사를 이어왔음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수많은 동지들을 볼모삼아 자유를 얻은 옛 조직의 총책과, 갇힌 그의 입에 재갈을 물려 기득권을 지킨 옛 동지와, 그 밖에 상처주고 상처입은 수많은 사람을 용서했다.

그가 갇힌 뒤 민족민주혁명당의 책임자였던 강철 김영환은 자신의 사상 전향과 조직 전모를 국가기관에 고해하고 <조선일보>에 반성문을 낸 다음 풀려났다. 사람들은 김경환의 구속을 놓고 “주범이 나왔는데 종범이 왜?”라는 의문을 품었다. 옥중 서한집의 발문을 쓴 문부식 <당대비평> 편집위원은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도서관 옥상에서 떨어진 선배가 전투경찰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모습을 보며 권력에 대한 분노를 배운 김경환과 이런저런 책들 속에서 사상적 ‘지도자’로서의 사명에 눈뜬 김영환이 같은 운동의 길 위에서 만났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면서 동시에 불행한 일이었다. 노동자로 살기 위해 손가락이 부러지고 코피를 흘리면서 노동을 배우려 했던 김경환을, 노동 현장에 발을 들여놓은 일도 없이 노동 운동가를 자처하면서 ‘주체사상’을 훈계하던 <강철서신>의 필자가 지도할 수 있다고 상호 인정되었던 것이야말로 지난날의 운동이 지녔던 가장 큰 비극이었다.” 불행과 비극의 시대는 지났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사상과 사람을 모두 버리며 전향한 ‘총책’은 관용의 대상이 됐고 사상을 버려도 사람을 버릴 수 없었던 ‘조직원’은 공안기관의 실적과 정치적 거래를 위한 희생양이 됐다.

내 안에 모두의 길이…

서한집에서 김경환은 자기 연민의 흔적없이 맑은 시어로 이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 “…나 아닌 이들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에게는 나의 길/ 모두의 길이 있다.”(시 ‘길’에서) 나아가 그는 “나는 갇힐 만하니 갇혔다”고 말한다. 한치의 여백도 허용하지 않았던 밀도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절대주의와, 직선의 운동을 전부로 여겼던 아집이 자신을 가뒀다고 말한다. 그는 또 고백한다. 자기 안에 오사마 빈 라덴이 숨어 있었다고. 자기 안의 적을 그대로 둔 채 자기 밖의 적을 향해 싸워 왔노라고.

그는 책의 제목을 감옥 창틀에서 그와 한 계절을 ‘동거’했던 여린 비둘기의 처녀비행을 보며 땄다. 이 제목은 세상을 향한 그의 다짐이기도 하다. <비상을 꿈꾸는 새는 대지를 내려다본다>(호미 펴냄).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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