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부터 성인까지 뜨거운 신화 읽기의 열풍, 그 원인은 무엇인가
지난해 출판계를 뜨겁게 달궜던 신화 열기가 새해 들어서도 식을 줄 모른다.
신화 붐의 기폭제이자 촉매제 노릇을 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웅진닷컴)는 1권이 100쇄 50만권의 대박을 터뜨린 데 이어 2월 2권이 나왔다. 출간 보름 만에 7쇄를 찍으며 각종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상위권에 오르는 등 벌써부터 기염을 토하고 있다.
가나출판사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이광진 글·홍은영 그림) 역시 2월 들어 제9권을 내놓으며 다시 한번 어린이들의 발길을 서점가로 끌어모으고 있다. 지난해 어린이책 단행본 시장에서 교양학습만화 발간 붐을 불러일으켰던 이 시리즈는 지난해 말 8권까지 발행하며 통틀어 100만권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 덕에 공룡과 포켓몬 캐릭터의 어지러운 이름들을 외우던 어린이들 사이의 암기 붐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숱한 신들 이름 외기로 옮겨가기도 했고, 지난해 7∼9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그리스 로마 신화전에선 같은 책을 든 어린이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20년 동안 연간 매출액 1억원을 오가던 출판사 매출액도 지난해 무려 30여억원으로 치솟았다.
삶을 원형질을 되돌아 보다
이들말고도 지난해 출간된 신화 관련 서적만 100여종에 이른다. 10만부가 넘게 팔린 <만화 그리스 신화>(사토나카 마치코, 황금가지)와 이탈리아판 <만화로 보는 위대한 그리스 신화>(루치아노 데 크레센초, 문학수첩) 등 만화물 출간이 꼬리를 물었고, <초등학생을 위한 그리스 신화>(웅진닷컴)와 <동화로 읽는 그리스 신화>(김세희 등 옮김, 파랑새 어린이) 등 동화물들도 쏟아져나왔다. <명화 그리스 신화>(웅진닷컴)나 <세계 명화와 함께 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박현철, 푸른숲) 등 서양 미술사 속에 그려진 신화의 세계를 소개하는 책들도 적지 않았다.
올해도 신화 출간 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이미 에이전시를 통해 웬만한 신화 관련서는 죽어 있던 것마저 계약이 끝난 상태”라며 “2002년에도 신화 관련서는 폭발적으로 출간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회사원 안아무개(36)씨는 “아이에게 시로 나온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9권을 사줬더니 벌써부터 10권은 언제 나오냐며 매일같이 컴퓨터로 출간 여부를 검색해달라고 조른다”고 말했다.
신화에 대한 학술적 조명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신화 공동연구모임 신화아카데미가 지난해 10월 <신화아카데미 연구총서1:세계의 창조신화>(동방미디어)를 내놓았고, 안진태 교수(강릉대 독어독문학)는 9월 <신화학 강의>(열린책들)를 펴냈다. 올 들어선 <중국신화의 이해>(전인초 정재서 김선자 이인택 지음, 아카넷 펴냄)와 <동아시아 비교 서사학>(최원오 지음, 월인 펴냄) 등 동아시아 신화 전반으로 신화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들이 이뤄지기도 했다.
인간의 과학이 신의 영역을 위협해 들어가고 있는 21세기 현실에서 왜 한국의 독자들은 신화읽기에 몰입하고 있는 것일까.
먼저 신화에 대한 관심의 증대가 한국만의 사정이 아니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도서출판 뜨인돌의 박철준 기획실장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프낙 서점에 들렀더니, 곳곳에 다양한 형태의 신화 관련서가 있는 것으로 봐서 그곳도 신화 시장이 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신화 서적 붐에는 21세기에 들어와 인간 속성에 대한 반성의 마음도 많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정재서 교수(이화여대 중문학)는 “과학과 기계론적 합리론에 치중해온 인류 정신문명사의 거대한 전환과 관련된 변화”라고 이를 짚어냈다. 그는 “그동안 비합리적이고 황당한 사고로 치부해온 신화적 상상력이 새로운 활기를 부여받기 시작했다”며 “이성주의의 폐단을 지켜본 사람들이 신화를 소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화의 상상력이 노골적으로 지금껏 확립된 인간사회의 제도적 금기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지적은 귀기울일 만하다. 가령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권은 사랑을 테마로 한다. “인간의 도덕과 관념이 시작되기 이전, 어떠한 금기나 윤리적 잣대로도 재단되지 않은 채 뒤엉켜 있는 인간의 마음과 사랑의 원형질을 신화를 통해 들여다보게 한다.”
“신화는 비윤리적일 때 꽃핀다”
신화 속 사랑의 모습들은 우리 시대의 도덕적 통념과는 너무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신화시대의 사랑은 적나라한 야생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황소를 사랑한 여왕 파시파에며 아버지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에 어머니마저 살해한 엘렉트라, 양성을 동시에 경험한 이피스의 이야기들은 사랑의 경계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을 뒤흔들어놓는다. 근친상간(뷔블리스, 스뮈르나, 휘폴뤼토스), 트랜스젠더(헤라클레스, 이피스, 테이레시아스), 동성애(아폴론, 사포)의 사례들은 시간과 더불어 제도라는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여온 사랑의 원형질을 날것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지은이는 “신화는 어쩌면 도덕과 윤리가 진화한 역사를, 이야기 형식을 빌려 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신화는 원래, 꼬장꼬장한 도덕군자들을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게 할 만큼 비윤리적일 때 꽃을 피운다. … 신화가 고대 비극 작가들의 영감을 끊임없이 자극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 인류는 오랜 방황 끝에 오늘날과 같은 사랑의 문화를 이루어낸 듯하다.”
그러나 오랜 방황 끝에 이루어낸 사랑의 문화가 오늘날 도리어 강력한 금기로 인류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있음은 현실의 인간이 직면한 아이러니다. 그 금기는 이성과 합리, 도덕이라는 코스모스적 사고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코스모스가 더이상 풍요로운 문화를 보장하고 있지 못하다는 반성이 신화적 상상력으로의 귀환을 추동한다. 이미 현실에선 동성애며 트랜스젠더를 바라보는 완고하던 사회적 시선에 균열이 일고 있다. 신화읽기는 그 균열과 혼란을 이해하기 위해 지금의 코스모스 이전의 카오스적 삶의 원형질을 들여다보려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출판사 황금가지의 장은수 편집부장은 “삶의 원형을 되돌아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소설이나 사상서를 읽는 것이지만, 사회가 전체적 방향타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통찰력 있는 작품들이 나오지 않고 있다”며 “신화읽기는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으로, 인류의 오랜 지혜가 원시간에 가까운 이야기일수록 힘이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라고 말한다(이하 출판인들의 발언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펴낸 <책의 현장 2002>에서 발췌인용).
그러나 이러한 원형의 추구가 단순한 원형으로의 회귀로 이해돼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윤기씨는 “유럽 미술사가 그리스 로마의 헬레니즘과 기독교의 헤브라이즘의 삽화그리기라는 전통을 벗어던진 것은 마네가 <풀밭위의 식사>라는 완전히 새로운 형식을 선보이면서였다”며 “지금 신화읽기가 바로 그처럼 제도의 규정력을 벗어나 새로운 상상력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미지·디지털의 시대와 결부
이미지와 디지털로 대변되는 문화산업의 개화와 그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의 증대도 신화읽기 열풍의 주요한 배경으로 꼽힌다. 정재서 교수는 “첨단 디지털과학의 발달로 온갖 이미지의 재현이 가능해졌고, 영상산업의 개화로 이미지에 대한 감수성이 놀랄 만큼 높아졌다”며 “신화는 그런 이미지를 장악하고 파악하는 데 가장 원천적인 상상력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장은수씨는 “한국에서 신화가 이렇게 돌풍을 일으킨 것은 현재 한국 문화산업의 저변이 확대되어 있는 것도 한 이유”라고 말한다. “문화상품의 특징으로 변형가능성을 들 수 있다. 다양한 매체에 복제되고 변형될 수 있도록 이야기가 단순하면서도 깊어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의 사건들은 아주 나이가 어린 아이들부터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까지 삶의 고비마다 반복되어 체험하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신화는 유아용 상품에서부터 노인용 상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상품으로 복제되고 있습니다.”
이런 지적은 특히 어린이들 사이의 만화 신화 붐을 이해하려 할 때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애니메이션과 게임 등 비주얼 이미지와 캐릭터에 익숙한 어린이 세대에게 만화로 재현된 신화의 이미지는 피하기 힘든 유혹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출판평론가 이권우씨는 자신의 딸의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 딸이 그리스 신화를 보면서 즐기는 것은 신화 그 자체가 아니라 포켓몬의 구조에서 신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포켓몬을 즐기듯이 신화를 즐기더라고요. 독특하죠. 우리는 신화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아이들은 다르게 생각하더라고요. 그 속에서 줄줄이 계보를 외우기 시작하는데 퀴즈를 내보라고 해서 퀴즈를 내면 모르는 게 없는 거예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런 구조 속에서 신화 열풍이 계속 된다면 아주 오랫동안 갈 가능성이 많다”는 예측이 가능해진다. 이권우씨는 “게임이라든지 판타지, 만화영화가 기본적으로 신화의 얼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현상은 오래 갈 것”이라고 진단한다. 정재서 교수는 “신화 열기는 포켓몬 등 캐릭터 산업의 번창과 애니메이션의 발달 등에 힘입고 있다”며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판타지문학과 그를 이용한 문화산업의 발전에도 신화적 상상력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지적과 미묘한 차이를 지닌 견해도 제기된다. 이윤기씨는 “포켓몬 같은 것은 이름 외우기에서 상상력이 막혀 있는 반면, 그리스 신화는 유럽문화 전반의 이해를 향해 상상력이 열려 있다”고 캐릭터 열기와 신화읽기의 차이를 지적했다. 그러나 그도 이미지와 신화의 연관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는 “아이들이 이미지를 통해 유럽문화의 원형에 대한 이해에 다가서게 된 것은 중요한 문화적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리스 로마전에서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방패를 들고 있는 여신은 아테네’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으며 전율을 느꼈다. 유럽 미술사에서 아테네는 방패를 들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다. 우리 아이들이 어느새 유럽문화를 규정해온 상징의 존재에 다가서고 있음을 울먹이며 보고 있다.”
신화적 상상력의 소환과 이미지의 대두라는 시대적·사회적 배경과 함께 이윤기라는 역량있는 작가를 만난 점 또한 신화 열풍의 한 원인으로 꼽힌다. 이씨는 25년 전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연구해왔으며, 90년대 <그리스 로마 신화>(대원사) 번역을 시작으로 우리 사회의 신화 열기를 준비해왔다. 출판사 휴머니스트 김학원 대표는 “이윤기 선생이 처음으로 신화라는 텍스트를 교양서로 만들어내면서 30, 40대와 중·고생들이 같이 읽을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해주었다”며 “아동서 시장의 열기 또한 이미 이윤기 선생의 책을 읽고 신화에 눈뜬 성인 독자들이 아이들에게 맞는 신화 책을 골라주다보니 생겨난 현상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비합리적 전체주의의 위험성도
신화 열기는 올해도 우리 사회의 주요한 문화적 현상으로 남게 될 것 같다. 신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정재서 교수는 “신화는 현실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동시에 두 가지의 문제점도 지닌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론 현실을 잊고 도피하려는 심성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으며, 사회 전체적으론 비합리적 전체주의의 광기에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안족의 신화를 강조하며 바그너의 악극을 숭배했던 나치즘이나 건국신화를 통해 만세일계의 천황지배설을 뒷받침한 일제 군국주의의 사례가 신화를 전체주의의 확립에 오용한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역사는 신화에 담긴 비합리적 사유의 상상력에 열려 있되 이에 매몰되진 말아야 한다는 점을 역설해주고 있다. 신화 열풍이 단순히 신화적 이미지의 과소비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우리 사회의 신화 열풍은 지나치게 대중적 열기에 휩쓸려 있는 점이 있다”며 “신화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차분한 접근들이 함께 따라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사진/ <에오스와 케팔로스> 1810. 파리, 루브르 박물관.
삶을 원형질을 되돌아 보다


사진/ 신화 영풍을 몰고 온 대표적 작가 이윤기 씨. "지금의 신화읽기는 제도의 규정력을 벗어나 새로운 상상력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사진/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를 즐기듯이 신화를 즐겨보는 어린이들이 늘고 있다. 만화와 게임의 구조가 신화의 구조와 닮았기 때문이다. (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