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추함’은 폭력을 동반한 강력한 통제 수단이다. <못생긴 여자의 역사>를 보면, 남성 기득권을 위협하는 모든 여자는 추했다. 아이와 남편 없이 독립적으로 살며, 식물과 몸에 대한 지식을 가진 여자인 마녀들은 실제 외양이 어떠했건 추한 여자로 그려졌다. 근대 들어 학구열을 가진 여자들은 프랑스에서 ‘파란 스타킹’으로 불렸는데 이들에 대한 묘사는 하나같이 추하다. 그리고 ‘추함’이란 딱지가 붙는 순간 그들은 타죽고, 격리되고, 모욕당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됐다. 추한 여자의 24시간 CCTV “하나같이 추한 이목구비에, 목소리가 걸걸하거나 미친 사람 같다.” 19세기 피에르 프랑수아 티소가 프랑스대혁명에 참가한 여성을 묘사한 문장이란다. 많이 듣던 소리다. 요즘 페미니스트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된다. 200년이 지나도 ‘추함’의 작동 원리는 변하지 않았다. ‘추함’은 잔인하다. 가해자는 아무런 증명을 할 필요가 없다. 책임은 ‘추한 자’로 지목된 피해자가 진다. 더 끔찍한 것은, 타인의 시선이 자신의 시선이 돼버린다는 점이다. 자신의 시선이니 도망갈 곳 없는 24시간 폐회로텔레비전(CCTV)인 셈이다. 이 CCTV 감시에 갇혀 내 몸인데 내 몸처럼 움직이지도 못했다. 몇 달 전 춤 워크숍에 참여했을 때 내 몸이 내 감옥이 돼버렸다는 걸 알았다. 첫 시간 60대부터 10대까지 10여 명이 둥그렇게 둘러섰다. 선생님이 발로 자기소개를 해보자고 했다. 한 20대 여자는 발을 동동 구르더니만 아예 주저앉아 꿈틀거리며 이름을 말했다. 멋있었다. 60대 남자는 펄쩍 뛰며 두 발로 짝짝이를 쳤다. 멋있었다. 신발을 신고 도망가는 걸로 자기소개를 하고 싶었던 나는 겨우 발을 앞뒤로 한 번씩 내밀고는 내 차례가 끝난 것에 안도했다. 발을 2㎝ 내미는데 내 시선은 내 내부가 아니라 나에게 꽂힐지 모르는 타인의 시선에 가 있었다. 그 워크숍에는 다시 가지 못했다. 지난 7월14일 서울시청 앞 광장,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영화 <스타워즈> 속 털북숭이 ‘츄이’ 같은 사람을 봤다. 삼복더위에 온몸에 대걸레 같은 걸 달았다. 공룡 두 마리, 속눈썹을 무지개 색깔로 염색하고 반짝이는 먼지떨이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여자, 검은 망사 티셔츠를 입은 남자, 수많은 몸이 있었다. 폭염과 음악이 쏟아졌다. 뇌가 기포가 될 것 같았다. 집요했던 시선의 빗장도 흐물거렸다. 퍼레이드 차량을 털북숭이 츄이, 먼지털이 치마, 공룡, 전동휠체어, 여자, 남자, 인간들이 따라갔다. 종로 찻길을 함께 걸었다. 땀이 솟구쳤다. 그 위로 바람이 스쳤다. 눈에 하늘의 파란색이 쏟아졌다. 내 몸에 스미는 세상을 감각할 수 있었다. 같이 춤추고 싶었다. 364일, 거리는 서구형 미인들을 내건 광고판들 차지 아니었나. 내 ‘원죄’를 들먹이는 ‘기준’들 말이다. 1년의 하루, 그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시선의 독재를 비껴가는 해방감을 맛봤다. 내 몸의 종전은 언제일까 친구와 내년에는 옷장에 처박아두고 차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옷을 입고 오자고 했다. 어깨가 확 드러나는 공주풍 옷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흔들어보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안다. 내년에 그리 못할 거다. 몸은 치열한 전쟁터이고, 나는 이미 시선의 포로다. 이걸 뚫고 나가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안다. 그래도 내 인생의 주인까지는 탐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 몸의 주인으로 살아보고 싶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 그 지난한 여정을 여드름에 꽂혔던 시선이 나에게는 상처였다는 걸 자신에게 고백하면서 시작한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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