❺발에 동상 입은 여성 빨치산 전쟁포로가 수도사단 포로구역에 있다. 1951년 12월10일 폴 E. 스타우트 촬영.
사진❹는 한 무리의 여성과 아이들이 대기하는 모습을 찍었다. 엄동설한이라 잔뜩 웅크린 것일까? 빨치산 전쟁포로로 처리되는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한 듯 고개를 떨구는가 하면, 수군거리는 여성들도 있다. 자신을 찍는 미군 사진병을 바라보는 두 여성의 시선이 참 미묘한 감정이 들게 한다. 사진❺ 속 여성은 동상에 걸려 앉아서 대기하는데, 자신이 전쟁포로임을 나타내는 인식표를 들고 있다. 포로가 된 일시와 장소 등 정보가 적혀 있다.
전선이 위아래로 심하게 요동치는 난리 통에, 후방에도 큰 산에 ‘제2전선’이 펼쳐진 상황에 피란민이 안전할 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았다. 주요 도로는 이미 미군과 한국군이 방어와 보급을 위해 차지했고, 여기에 접근하는 것은 목숨이 여러 개여도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1951년 ‘1·4 후퇴’ 뒤 미8군의 피란민 유도 정책에 따르면, 피란길로 허용된 도로는 몇몇으로 한정됐다. 대전 이남으로 통행하는 차량에 민간인 탑승을 금했고, 대전 이남의 열차에는 이리(1995년 5월 행정구역 개편 때 전북 익산군과 합쳐져 익산시가 신설되면서 폐지)를 제외하고 어떤 피란민도 허용되지 않았다. 다른 지역 피란민들이 대구 이남의 경상남도로 들어오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고, 이미 들어온 피란민들은 대구의 경우 전라도로 보내고, 부산의 경우 거제도와 제주도로 옮긴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군은 차치하고, 한국 정부와 한국군에 피란민은 어떤 존재였을까? 피란민도 보호할 국민으로 여겼을까? ‘불순분자’와 흰옷을 입고 변장한 적이 침투한 오염된 무리로 보았다. 이런 인식이 팽배했기에 피란민을 거리낌 없이 공산주의자 전쟁포로로 처리했다. 국민이 포로가 되었고, 때로 비국민의 문턱으로 넘어갔다.
최근 국민의 안전을 들어 한국에 난민 수용을 반대하고 난민법을 폐지하자는 청와대 청원이 역대 최다 추천을 기록했다.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성원으로서 신분,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또는 오랜 내전 상태를 이유로 한국에 온 피란민(refugee)을 수용하지 말자는 주장은 ‘그들’을 온 곳으로 강제로 돌려보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대한민국 국적자, 국민으로서 ‘우리’의 안전이 중요하지 ‘그들’까지 왜 보호해야 하느냐, 박해를 피해서 온 ‘그들’의 상황은 유감이지만, ‘그들’ 중에는 가짜가 있을 것이고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농후하니 ‘그들’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고, 이번 기회에 그 근거인 난민법도 폐지하자고 한다. 한마디로 난민을 ‘비국민’으로 본다.
국민과 비국민을 가르는 경계
국민과 ‘비국민’의 경계는 명백할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국적자가 되면 국민이고, 당연히 보호받는 것일까? 한국 현대사는 그 국민을 ‘비국민’으로 처리해 국가폭력을 자행했던 숱한 사례를 보여준다. 올해 70년이 된 ‘제주 4·3’에서, 한국전쟁기 피란민 인식과 처리, 자국민 학살 사건들에서, ‘광주 5·18’, 심지어 ‘세월호 참사’에서도 보지 않았던가? 국민과 ‘비국민’을 가르는 경계가 국적자와 비국적자 사이에 있다고 자명하게 생각하는 것은 순진하다.
2015년 차가운 겨울 해변에 떠밀려 온 어린 쿠르디의 주검 사진을 보고 동정했던 ‘우리’ 국민은 고작 561명의 ‘예멘 난민’(대부분 남성)이 제주도에 입국해 ‘우리’ 앞에 나타나자 불안을 넘어 공포에 빠져버렸다. 배타적 국민주의의 기운이 넘실대고 이슬람 혐오 발화도 쏟아졌다.
그동안 난민신청자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많았다. 1994년 이후 3만2천여 난민이 출입국 송환대기실에서, 외국인 보호소에서, 2013년부터는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에서 비가시화한 채 포로수용소 포로처럼 장기간 구금됐다가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실상 강제송환됐을 뿐이다. 강제송환의 끝은 수많은 투옥과 죽음일 것이다.
난 이 외국인 ‘지원센터’와 ‘보호소’에서 자행되는 일들을 볼 때마다 재일조선인과 한국인 밀항자를 강제송환하기 위해 장기간 구금했던 일본의 오무라수용소(입국관리센터)가 떠오른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포로로 간주돼 수용소에 구금됐던 한국인 피란민들의 처지가 겹친다. 이 경험과 감각으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국민’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배타성을 어떻게 성찰할 수 있을까?
주목받는 정우성의 말과 행동
난 ‘국민’ 프레임으로도 난민을 우리 이웃으로 환대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활동가 정우성의 말과 행동에 주목한다. 오랫동안 난민을 지원하고 한국이 명실상부한 난민보호국이 되도록 촉구하고 압박한 변호사들과 국제·국내 시민단체 활동가의 헌신이 있었기에,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과 감각으로 난민이라는 존재성을 고민했기에 정우성이 난민 지원 활동가로 거듭났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들이 있기에 난민을 둘러싼 혐오 발화를 상쇄하고도 남을 성찰적 언어와 실천이 많아지리라 기대하면 낙관적인 것일까?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