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A는 내게는 당연해서 시들해진 삶의 터전을 반짝반짝 빛나는 감탄과 설렘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사진에 담긴 동네 장터, 식당, 거리 모습은 모조리 빛이 났다. 내가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서 살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넓지만 별다른 소용 없이 방치됐던 주방도 요리를 좋아하는 A 덕분에 활기가 돌았다. A의 남편이 상그리아(포도주에 소다수와 레몬즙을 넣어 만든 스페인 술)를 만드는 장면까지 사진으로 전송됐다. 우리 집 거실의 팝콘 메이커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팝콘 제조 과정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A의 딸을 동영상으로 수차례 반복 재생해서 보기도 했다. 내가 있던 자리에서 누군가는 저토록 전부를 누리는구나 싶어 뜨거운 감사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서재 또한 그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A는 내 책장의 책을 읽어도 되는지 물었고 괜찮은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어울릴 만한 소설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계단 위의 여자>와 오르한 파무크의 <눈>을 골랐다. 그리고 여름에 와인과 함께 읽기에 안성맞춤인 <여름 거짓말>(베른하르트 슐링크 씀) 단편집도 추천했다. 말을 꺼낸 다음날 A에게 연락이 왔다. 이 집이 다 좋아, 언니 “언니, <계단 위의 여자> 단숨에 읽었어. 정말 재밌었어. 읽는 내내 언니 생각하면서 보니까 더 특별하더라. 지금은 파무크의 <내 마음의 낯섦>을 읽고 있어. 이국적이고 흥미로워. 언니가 말한 책은 바로 찾지 못해서 같은 작가의 다른 책으로 골랐어. 이 집도, 여기서 읽는 책도 다 좋아, 언니. 정말 행복해.” 그가 내 책장 앞에 서서 책을 빼 들어 읽는 모습을 상상하니, 20대의 내가 사랑했던 한 남자의 집과 그의 책장이 떠올랐다. 격렬한 사랑의 한가운데 태풍의 눈처럼 평온했던 그의 서재 속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가 출근한 뒤 펼쳐졌던 느린 오전의 날들 속에서 그의 책을 몰래 꺼내 읽었다. 책 구석구석 숨겨진 메모를 탐닉했고 그의 필체를 눈동자로 핥으며 따라갔다. 그리고 지금, 누구에게도 개방되지 않았던 나의 책들이 무방비 상태로 A에게 주어졌다. 어느 순간 어디에서 펼쳐질지 모른 채, 깊고 오래된 저마다의 비밀을 간직한 채. 내 책들의 미묘한 설렘이 대륙을 건너 이곳까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책장의 팔랑이는 감촉도, A의 손끝에 닿을 종이의 떨림도, 춤추듯 시선을 따라갈 활자들의 흐름도, 때로는 폭죽처럼 솟아오를 단어의 향연도, 스며들다 퍼져나갈 은밀한 기억과 책이 속삭여줄 오래된 지혜, 그 감동의 파동도. 나와 두 딸이 머물게 된 A의 집은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한강 전경이 널따랗게 펼쳐지는 곳이다. 나는 이 집에 얽힌 A의 이야기를 그에게 들어 알고 있다. 그가 새벽을 맞이하며 바라봤던 일출의 장면과 한때의 절망과 슬픔에 귀 기울였다. 그의 이야기 속 배경이 된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게 신기해서 한동안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옛 영화를 상영하듯 장면을 그려봤다. 사람은 누구나 다 특별한 이야기를 품고 산다.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자리에서 재구성할 기회는 더더욱 특별했다. 나는 A를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을 거슬러 한강 저편의 광경을 더듬듯 훑어가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어느새 그의 공간이 내게 익숙한 자리가 되는 것 또한 특별한 경험이었다. 동시에 내 삶의 사건이 이곳을 배경으로 펼쳐졌다. 헤어진 누군가를 떠올리며 가슴 아파한 밤도 있었다. 간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와 옛 기억을 더듬어가며 뜨거워지는 전화기를 귀에 대고 A의 소파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막 사랑을 마감한 친구 B의 이야기를 식탁 의자에 앉아 들었다. 덥고 축축한 도시로의 여행과 짧은 로맨스를 만끽한 후배 C의 모험담을 경청하기도 했다. 딸아이가 흥얼거리는 한국 아이돌 가수의 히트곡을 원곡 한 번 들은 적 없이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아이가 새로 완성한 애니메이션을 함께 시청했다. 올해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팔로어를 10만 명까지 늘리겠다는 목표를 가진 아이는 안방 침대에 함께 누워 말했다. “엄마, 내가 아홉 살 때 꿈이 유명한 유튜버가 되는 거였는데, 조금은 이룬 듯해서 뿌듯해.” 그가 세운 계획은 차곡차곡 실행되는 중이었다. 계획에 맞춰 작품도 성격을 바꿔가며 업로드되고 있음을 설명을 듣고 알았다. 내 것이라 너무 쉬웠다 그리고 바로 지금, 나의 유튜버 첫째 딸보다 한 살 많은 A의 아들 T군은 온라인상에서 만난 캘리포니아 여자친구를 처음 만난 감격에 구름 위를 걷듯 들떠 있다. 거리 곳곳에 흘러나오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눌 지경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이들이 각각 서로의 공간에서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은 두 엄마를 모두 설레게 했다. 우리는 이렇게 자리를 바꾸어가며 서로의 행복에 기뻐하고 있다. 서로의 자리에 각각의 행복을 남기고 떠날 마음으로 살아가니 오늘 하루의 행복이 예사롭지 않다. 나의 행복은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이 공간을 채우고 떠날 행복이다. A도 저 멀리 내 집에서 그만의 행복을 심어서 곳곳에 틔우는 중이니까. 공간을 바꾸는 일은 삶을 나누는 행위이자 서로의 행복에 좀더 열렬해지는 일이기도 함을 경험으로 배우는 중이다. 평범해진 일상에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이고 문을 열어 환기하고 삶이 얼마나 새롭게 재탄생될 수 있는지 타인의 자리에 들어가서 모색하는 일이다. 지금 여기 나의 행복이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훗날 이어질 다른 행복의 전령됨으로 해석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이와 같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배려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공간을 향한 존중 또한 있어야 한다. 나는 내가 머무는 이곳을 그들 삶의 일부를 돌보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 것이라고 여긴 것은 함부로 대하며 살아왔다. 내 것이므로 덜 신경 써도 되고 나중에 돌봐도 되는 것으로 여겼다. 내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내 몸과 마음이므로 낭비하듯 써버리고 망가지고 나서야 어리석음을 자책하는 날들이 반복되듯 이어졌다. 나이므로 나를 가장 미워할 수 있었고 넘치는 물을 쏟아버리듯 나를 버리고 방기하기도 했다. 세상에서 나만큼 나를 잘 돌봐야 할 사람이 없음에도 나이기에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줄 알았다. 사랑하는 친구의 공간에 들어와서 그의 일부를 맞이하듯 살아가다보니 지난날의 무책임함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 내 집은 내 것이기에 사랑받지 못했다. 당연하게 여겼고 무심히 대했다. 내 몸은 내 것이기에 혹독히 다뤄져도 괜찮은 것이었다. 모두 내 무심함과 내 혹독함이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친구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피어나는 내 공간을 바라보니 새삼 미안해졌다. 사랑할 것을 가까이 두고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삶을 되돌아봤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사랑한 줄 알았지만 가장 쉽게 따돌리고 가장 쉽게 괴롭힌 건 나 자신이었다. 가장 독한 비난의 대상이 된 것도, 다시는 안 볼 듯이 몰아붙인 자도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매일 마주치는 나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죽을 때까지 나와 이별할 수 없으니 내가 가장 쉽고 가장 간편하게 미워할 상대인 줄 여겼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가 사랑하는… 며칠 전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중이었다. 옆에 있던 딸아이가 내 이마를 슬쩍 만지며 말했다. “엄마, 요새 로션 바꿨지?” “응, 그때 너랑 같이 샀잖아.” “그거 안 좋은 것 같아. 바르지 말고 다른 거 써.” “왜?” “엄마 얼굴에 주름이 생겼어.” 늘어나는 주름을 나보다 더 먼저 발견하는 딸아이가 사랑스럽고도 애처로웠다. “괜찮아. 늙으면 다 생기는 거야.” “그래도 이건 갑자기 생긴 거니까 신경 써야 해.” “이왕 산 건데 아까우니까 다 바를 거야. 대신 더 건강히 먹고 몸에 더 신경 쓸게.”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의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잘 돌봐야 한다. 그건 바로 나다. 나는 나를 아끼고 돌볼 테다. 바르게 사랑할 테다.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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