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콤플렉스는 팜파탈처럼 변화무쌍한 매력을 지녔다. 콤플렉스를 좀 알겠다 싶어 붙잡으려 하면 어느덧 제 모습을 감춰버리고, 콤플렉스를 외면하려 하면 언제 사라졌냐는 듯 여 보란 듯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콤플렉스를 제거하려 애쓰기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콤플렉스는 그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또 다른 삶을 체험할 기회를 열어준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 콤플렉스였던 나는 ‘말하기’ 대신 ‘글쓰기’로 내 감정을 표현하는 습관을 들였다. 남들에게 사소해 보이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느껴지고, 남들에겐 무난하게 견딜 수 있는 자극이 내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그것을 내밀한 글로 정리해두곤 했다. 타인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아픔이나 걱정 같은 감정이 ‘글’의 형태가 될 때는 좀더 차분하고 정돈된 ‘사유’로 바뀌는 희열을 체험했다. 예민한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말 때문에 상처받는 일이 많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글로 표현하면 뜻밖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내가 굳이 작가가 되지 않았더라도 그런 습관은 나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내겐 사람들의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이 보이고, 그 사람의 아픔이 더 자세히 들여다보이고, 그가 능수능란하게 매우 괜찮은 척하고 있을 때조차 그의 쓰라린 속울음이 들린다. 콤플렉스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콤플렉스의 그림자는 그것으로 인해 결국 나를 싫어할 위험이 있다는 것, 콤플렉스가 나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임에도 그것을 ‘전체의 문제’로 확장해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콤플렉스의 빛을 받아들이면 그림자조차 훌륭한 내면의 자산이 될 수 있다. 극도의 예민함을 ‘나의 진정한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자, 이제는 내 예민함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기 변신 과정은 어렵고 힘들고 아플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변신의 문턱을 마침내 넘으면 눈부신 자유가 보이기 시작한다. 예컨대 글을 쓸 때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객관성’과 ‘논리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나의 오랜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그런데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내 글은 전혀 다르게 해석됐다. 학교에서 선배들에게 실컷 비판받은 그 똑같은 글을 본 어떤 독자는, 내 글이 ‘감성이 풍부’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하며 논리적인 글 안에서도 감성적 울림을 주는 능력이 있다고 칭찬해주셨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쓰면 절대 안 되겠다’고 골머리를 앓게 한 그 글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토록 따스한 울림으로 다가갈 수 있다니. 타인의 콤플렉스에도 칭찬을 콤플렉스란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똑같은 글을 봐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부정적인 쪽으로만 해석해서 그 사람의 가능성을 꺾어놓으려 하고, 어떤 사람들은 최대한 긍정적인 쪽으로 바라보며 그 사람의 아직 덜 무르익은 잠재력까지도 현실의 빛 속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나는 후자가 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콤플렉스를 비판하거나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악성 댓글까지 달아가면서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못하게 의지를 꺾어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의 아주 작은 장점조차 커다란 가능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사람, 비평할 때조차 비판보다는 칭찬을 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게는 이미 나쁜 것을 ‘이러저러해서 너무도 나쁘다’고 비난할 시간이 없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비난하기보다는, 좋은 것을 더 좋게, 아름다운 것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내 삶의 에너지가 되기를 바랐다. 설령 나쁜 환경 속에 있는 미약한 좋은 씨앗이라 할지라도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장점을 깨닫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나 또한 ‘나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키워내고 싶었다. 나의 또 다른 콤플렉스는 매사에 ‘요약’을 못한다는 것이다. ‘요약’이란 것이 참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말을 요약해보세요”라고 요구하는 분들을 마주하면 맥이 탁 풀려버린다. 굳이 내 모든 말이나 글을 요약해야 한다면 왜 2시간 동안 목에 피가 맺히도록 강의했겠는가. “너는 왜 이렇게 글을 길게 쓰니”라는 비판을 자주 들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요약하는 재능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글을 늘려 쓰는 것은 ‘창조’지만 짧게 줄이는 것은 ‘편집’이다. 편집 능력도 중요하지만 창조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 내가 요약을 잘하지 못했던 것은 정말 짧게 줄이는 요령을 몰라서가 아니라 소중한 문장들 하나하나의 세밀한 뉘앙스를 죽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장뿐 아니라 감정을 증폭하는 데도 나는 엄청난 재능(?)을 발휘할 때가 있다. 감정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발단에서 바로 절정으로 치달아버린다. 이런 성격 때문에 ‘변덕스럽다’ ‘감정이 너무 불안정하다’는 평판을 듣지만, 그래도 이런 성격의 ‘뜻밖의 좋은 점’을 이야기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글로벌 호구’로 불려도 좋다 “네 안에는 만능증폭기가 달린 것 같아. 아주 조그만 감정만을 전달해줬는데, 너는 1초 안에 그것을 ‘울 수밖에 없는 사건’으로 만들어버려. 그것도 참 어처구니없는 재능이다, 그치?” 그게 설마 재능일 수 있는가.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어쩌면 그것이 내가 타인에게 공감을 잘하는 이유가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타인의 온갖 감정에 걸핏하면 공감하기 때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거구나. 공감을 너무 잘하면 남의 말에 잘 속아 넘어갈 수도 있고, ‘사기당하기 딱 좋은 캐릭터’로 ‘글로벌 호구’가 될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그래도 누군가가 나에게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과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 중에서 굳이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 내 안의 작은 감정의 씨앗을 거대한 애드벌룬처럼 부풀어 올리는 감정의 만능증폭기를 선택하고 싶다. 그게 멋지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과학자라면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택할지도 모른다. 내가 뛰어난 이성보다는 풍부한 감성을 택하는 이유는 그게 나이기 때문에, 그게 나답다는 것을 이제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감정적이다, 너무 잘 운다, 늘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비난을 받을지라도,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내 심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금방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내면의 눈물샘을, 턱없이 예민할 수 있는 권리를, 언제든 슬퍼하고 아파하고 흐느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콤플렉스는 우리를 분명 아프게 한다. 하지만 그 콤플렉스마저 삶을 더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에너지로 쓸 수 있는 사람에게, 콤플렉스는 때로 구원의 오아시스가 되어준다. 정여울 작가
독자 퍼스트 언론, <한겨레21>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