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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히딩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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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2-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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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16강보다는 감시와 폭력으로 얼룩진 우리 스포츠 문화에 대한 자성을

사진/ 위계화된 서열문화. 한국축구가 넘어야 할 산이다. (한겨레 김종수 기자)
나는 이봉주 선수가 언제나 1등만 했으면 좋겠다. 로테르담, 뉴욕, 세계선수권, 올림픽…. 우리의 봉달이, 출전 시합마다 족족 금메달만 땄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내 딸이, 우리의 아이들이 즐겁게 숲 속을 뛰어다녔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다. 둘 중 하나만 택하라면 나는 한순간도 지체없이 후자를 택하겠다. 마라톤 금메달, 꿈에도 바라는 일이지만 그보다는 우리 아이들이 새들이 지저귀는 숲의 터널 속으로 뛰어가서 오후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환경이 더 그립다. 쇼트트랙 전관왕. 반가운 일이지만 추운 겨울날 온 가족이 얼음을 지치며 놀 수 있는 비경쟁적 사회가 우리에겐 더욱 절실하다. 월드컵 16강? 까짓 16강이 무슨 대수랴. 16강이 아니라 8강, 아니 저 멕시코 고원의 승전보 이후로 4강까지 오른다면 ‘국운상승’의 기치가 될 판이겠으나 사실인즉 우리는 피파 순위 40위권 바깥의 몇몇 나라보다 더 열악한 생활체육의 환경에 처해 있다. 스포츠의 승전결과를 국운에 바로 대입시켜버리는 지난날의 폐단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만약 우리 축구가 16강에 8강이라도 진출한다면 어떤 수사들이 넘쳐날지는 뻔하다. ‘우린 해낼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우리는 아직 근대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실험’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

사진/ 골드컵 패배로 비난여론이 거셌지만, 정작 전지훈련장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그러니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나는 16강 진출에 온 정성이 쏠려 있는 이 순간, 우리 아이들이 자율학습, 보충수업에 온갖 학원으로 몰려다니느라 텅텅 비다시피한 학교 운동장과 놀이터의 초라한 모습이 더욱 눈에 밟힌다. 안방에서 세기적 이벤트를 주최하고 16강까지 염원하는 나라지만 그 내실은 더없이 황량한 그로테스크한 현실.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없으니 그걸 주차장으로 개조해서 주차난이라도 덜어보자는 어느 아파트단지의 부녀회 결정은 우리 일상이 얼마나 황폐한 진공상태에 처박혀 있는가를 여실히 증명해준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히딩크를 생각해보자. 물론 히딩크는 이같은 우리 현실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가 단기적으로는 16강을 이룩하고 그 효과로 장기적으로는 우리 축구의 전략 극대화에 신선한 기여를 하게 된다면 이는 모두가 뜻한 바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그 까닭으로 히딩크를 데려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히딩크 이후를 생각해야 하고 히딩크가 없는 한국 축구를 생각해야 한다.

아직 월드컵은 100일 남았고 베스트 11조차 선정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히딩크가 부임한 지 벌써 1년이 넘은 상황, 중간 점검의 차원에서 그의 효과를 차분히 새겨볼 필요가 있다. 히딩크에 대한 논란의 핵심은 ‘언제까지 실험만 할 것이냐’는 점이다. 아마 히딩크의 실험은 본선까지 지속될 것이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이 축구는 상대와 겨루는 시합이다. 북중미 골드컵이 다르고 유럽 전지 훈련이 다르다. 폴란드가 다르고 포르투갈이 다르다. 어쩌면 히딩크는 폴란드와의 본선 첫 경기에서 의외의 카드로 후반전을 실험할지도 모른다. 그게 축구감독의 일이다. 그런 일을 하라고 감독이 있는 것이고 그는 막중한 책임감 속에서 전략전술의 시기마다 창의적이고 과감한 실험을 하는 것이다. 그럴진대 아직 100일을 앞둔 상황에서 히딩크가 선수 개인의 테스트에서 전체적인 전술의 짜임새를 실험하는 것은 그의 고유한 영역이다. 감독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있어도 사전에 누구를 쓰라든지 1자 수비 대신 스위퍼를 쓰라든지 강요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므로 히딩크 축구에 대한 내용적 평가는 결국 본선 성적표를 들고 하는 수밖에 없다.

“이봐, 가서 즐기라구”

사진/ 히딩크 감독(왼쪽), 선수들과 어울려 연습하는 장면. (한겨레 김경무 기자)
나는 오히려 다른 측면에서 히딩크 효과를 찾아보고 싶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 축구의 부정적 현상과 무관하다. 그는 연고대 출신도 아니고 특정지역 사람도 아니다. 경기력과 무관한 공연한 시빗거리로부터 그는 자유롭다. 선후배 따지고 가리는 집단주의로부터도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는 후배가 선배 가방을 들어주는 서열문화에 어리둥절한 사람이며 기수별로 모여앉는 기이한 식사예절에 낯선 사람이다. 대화도 없고 친밀한 장난도 없는, 국가의 흥망을 어깨에 짊어진 듯한 과도한 책임감과 그에 따른 필요 이상의 침묵에 대해 의아한 사람이다. 대표팀의 비디오 분석관 아프신 고트비는 우루과이 평가전 뒤 어느 인터뷰에서 “히딩크는 매사에 긍정적이며 축구란 즐기는 것이라는 철학을 갖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즐기기는커녕 매를 맞으면서 축구를 했고 학교의 명예와 부모님의 은혜와 국가의 부르심에 감읍했을 뿐이다. 아직 우리는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수준이다. 히딩크는 이 견고한 집단주의와 전근대적인 축구문화에 작은 틈을 내줄 것이다. 이는 차두리의 데뷔전에서 잘 나타난다. 지난해 11월 세네갈과의 평가전에 후반전 교체 투입으로 데뷔전을 치른 차두리에게 히딩크는 딱 한마디 던졌을 뿐이다. “이봐, 가서 즐기라구.”

다음으로 그의 사생활. 약간의 논란이 있다. 우리의 관습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도 있다. 박종환 감독이 공개적으로 비판한 바 있지만 어쨌거나 그의 자유분방한 사생활이 ‘유교문화’에 익숙한 관계자 일동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틀림없다. 물론 서구라고 해서 무조건 자유분방한 것은 아니다. 월드컵 기간중에 부인이나 애인을 동반해서 성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 경기력 향상에 낫다는 주장도 있고 그래도 경기중에는 금욕이 최고라는 주장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경우 오직 단 하나밖에 강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기중은 물론이고 한번 선수가 되었다 하면 오로지 금욕과 절제만이 강요된다. 축구만이 아니다. 감옥 같은 규제와 감시 때문에 태릉선수촌을 탈출한 대표들이 한둘이 아니며 지난해 남자 양궁 선수들의 경우처럼 부당한 폭력과 인권침해에 맞섰다가 선수 생명을 끊긴 사례도 적지 않다. 이는 금욕과 절제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과 감시의 문제다. ‘그날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유보하는 것은 축구선수만의 비애는 아니다. 고시생, 소설가 지망생, 노동자, 수험생 등 사실 치열한 경쟁만이 존재하는 한국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생존 논리에 갇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폭력과 규제로 강요되고 억압된다면 이는 경기력 향상은 물론 선수 개인의 인간적 권리까지 파괴되는 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얻어맞으면서 배운 선수는 똑같은 방식으로 가르치게 된다. 금욕과 절제라는 미덕 아래 폭력과 감시가 끊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마리화나와 동성애가 아주 자유로운 나라에서 감독 한명이 날아온 것이다. 그는 애인을 데리고 전지훈련을 다니고 휴식시간에는 협회와 연락도 끊고 철저히 쉰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선수들도 곧 익숙해진다. 국내에서는 골드컵 패배로 비난여론이 드셌지만 정작 전지훈련장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폐막 뒤에는 “이틀 동안 휴식한 뒤 이동하는 날 아침에 보자”며 히딩크는 사라졌고 선수들은 철저하게 휴식기간을 지키자는 감독의 지시대로 자정까지 숙소에 들어오는 조건으로 모처럼 자유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유럽의 스포츠 문화를 보라

히딩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16강 진출 여부에 따라 그는 역적이 될 수 있고 영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2002년에만 축구를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축구만 하면서 사는 나라도 아니다. 월드컵은 2006, 2010으로 계속 이어지며 선수들과 관중 역시 나날의 삶을 지속한다. 이 연속의 드라마 사이에 히딩크가 잠시 특별 출연한 것이다. 선진적인 축구이론과 경험을 전수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히딩크를 통해 유럽의 스포츠 문화가 어떠한지를 깨닫는 것이 오히려 중요하다. 그리하여 우리 선수들이 더이상 매를 맞지 않고 즐겁게 공을 차는 날, 16강도 중요하지만 온 동네 공터와 숲 속 놀이터가 하루종일 뛰노는 우리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는 내일이 우리에겐 더욱 절실한 것이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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