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작업실에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말하곤 한다. “이 무중력의자에 앉아봐, 그럼 세상이 달라 보여. 모든 걱정이 사라진다니까.” 이렇게 한참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탁 내려놓는 마음의 자유’를 느껴보라 권하는데, 어느 날은 이렇게 실언하고 말았다. “자, 이 ‘무능력’의자에 앉아보라니까.” “뭐, 무능력의자라고?” 말하고 나서 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깔깔 웃고, 그 사람도 따라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말실수에도 무의식의 욕망이 담겼다는 프로이트의 메시지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무중력의자’라는 단어보다 ‘무능력의자’라는 실수가 내 마음을, 내 열망을 더 깊이 반영하는 것만 같았다. 이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만은 나는 한없이 무능력해지고 싶었다. 무능력해지는 느낌, 나른해지고 축 늘어지는 느낌이 진심으로 좋다. 말실수에 반영된 숨겨진 열망, 그것은 ‘가끔은,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추구하는 모든 노력을 멈추고 싶다’는 투명한 휴식의 꿈이었다. 나는 내 작은 무능력의자를 통해 늘 능력 있기를 강요받는 세계로부터 자유를 꿈꾼 것이 아닐까. 나는 지극히도 단순하면서도 저렴한 내 풋풋한 무능력의자 위에서 때로는 노력하기를 쉬는 법, 더 높이, 더 빨리 날아오르기만 하는 삶의 피로를 씻어내는 법을 연습 중이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다보니 나의 해맑은 무능력의자에 앉히고 싶은 가장 애틋한 사람, 두 분이 생각났다. 바로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여전히 기다려주시는 부모님이다. 아버지는 10년 넘게 뇌졸중을 앓고 계셔서 점점 더 운신의 폭이 좁아지셨고, 그런 아버지를 보살피시느라 어머니도 점점 쇠약해지신다. 나는 지하철역으로 부모님을 마중 나갔다. 이제 아버지는 지팡이를 두 개나 짚으면서도 잘 걷지 못하신다.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나는 길가의 모든 부서진 보도블록이나 움푹 파인 구덩이가 편찮으신 아버지의 안전을 위협하는 날카로운 흉기들처럼 보여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아버지의 모자를 가만히 바라보는데,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다. “Never stop exploring!” 탐험을 결코 멈추지 말라. 그 문장을 보는 순간 힘이 쭉 빠져나갔다. 동년배의 다른 아버지들이 힘차게 등산도 하고, 사회활동도 열심히 하고, 사업까지 번창하는 걸 보시면서, 아버지는 얼마나 ‘탐험을 시도할 수 있었던 그 옛날’을 그리워하실까. 아빠, 이제 탐험 같은 건 그만해 하지만 나는 그 ‘탐험을 결코 멈추지 말라’는 문장을 거부하고 싶어졌다. 너무 많은 탐험을 하느라, 늘 새로운 것을 찾느라, 우린 너무 지쳐 있지 않은가. 무일푼으로 시작해 한때 자신만의 어엿한 사업체를 일구었지만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내 아버지에게는 ‘새로운 탐험’이 아니라 ‘누구 눈치도 볼 필요 없는, 평화로운 휴식’이 필요하다. 나에게도 가끔은 모든 탐험을 멈추고, 가만히 내 안의 열망들을 내려놓는, 진정한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심하게 절룩이며 간신히 한발 한발 내딛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마흔이 넘어서도 아직 ‘아버지’를 ‘아빠’로 부르는 나는 어린 시절의 철없는 말투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아빠, 이제 탐험 같은 건 그만해도 돼. 아직도 일중독에 빠져 늘 새로운 걸 탐험하는 다른 아저씨들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돼. 아빠는 최선을 다했어. 아빠는 비록 실패했다고 느낄지 몰라도, 아빠의 진짜 성공은 ‘그 옛날 한때 잘나갔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변함없이, 지금 이렇게 함께 있다는 것’ 자체라고.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너무 쑥스러워 그런 다정한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검버섯이 부쩍 늘어난 아빠의 손을 꼭 잡아드렸다. 아버지에게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쌀쌀맞은 딸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자체가 우주를 탐험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가슴 떨리는 모험인데. 이제는 어떤 모험도 불가능해진 아버지의 쇠잔한 몸을 바라보며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택시를 타고 가시라고 차비를 드린다고 해도 기어코 지하철을 타시겠다는 엄마아빠와 실랑이를 벌이며 진이 빠졌지만, 아빠의 팔짱을 끼고 지하철역에 데려다드리며 비로소 그 쇠고집의 진짜 의미를 이해했다. 백발이 성성해진 우리 아빠는 딸과 함께 팔짱을 끼고 조금이라도 더 함께 걷고 싶으셨던 거구나. 아마 잔소리 대장님 엄마와 함께 걸으실 수 있는 시간도 조금 더 늘어나겠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생은 축제와 같다. 어떤 이는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오고, 어떤 이는 장사하러 오지만, 최상의 사람들은 관객으로 온다.” 어릴 때는 이 말에 절반만 동의했다. 진짜 축제의 진수를 아는 사람들은 열심히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기에. 노동이 휴식보다 중요하고, 창조가 관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마흔의 능선을 넘어가며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에게는 관객의 정서가 부족했음을. 휴식할 줄 아는 재능이 없었음을.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노고도 소중하고, 축제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수입도 짭짤하겠지만,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축제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임을. 요새 대중 강연에서 “글을 쓰지 않을 때, 혼자 있을 때는 무엇을 하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 질문에서 나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넘어, ‘시간을 계산하고 관리하는 법’을 넘어 이제 ‘시간을 즐기고, 향유하고, 시간을 축제로, 시간을 예술로 만드는 법’을 생각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감상자가 주는 관찰의 기쁨 나는 ‘글을 쓰지 않을 때’는 ‘행복한 독자’이자 ‘행복한 관객’으로 있는 상황을 가장 좋아한다. 무엇을 써내기 위해, 무엇을 창조하기 위해 24시간 ‘올인’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렇게 ‘표현’에만 신경 쓰면 내실이 생기지 않고 결국 표현할 소재도 고갈돼버린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10% 정도라면 90% 정도는 읽고, 느끼고, 감상하고, 이해하고, 음미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음악은 물론 영화, 미술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 속 대화까지, 혼자 길을 걷다가 발견한 모든 자잘한 일상 속 풍경까지 나는 ‘행복한 감상자’가 되어 관찰의 기쁨을 배우려 한다. 축제 속에서 가장 행복한, 진정한 관람자가 되기 위해. 마흔을 넘어선 뒤, 이제는 스케줄에 목매지 않는다. 프랭클린 플래너식 시간표를 써가며 극단적으로 자기관리를 하지도 않는다. 휴식의 시간, 여백의 시간, ‘아름다운 무능력의 시간’ 속에서 노동의 시간보다 훨씬 더 크고, 깊고, 영롱한 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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