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대낮 알래스카에서 춤판 C-6. 유전적으로 동일한 여러 실험식물 가운데 하나였다. 종이컵에 심은 C-6은 이상한 행태를 보였다. 이파리들을 이리저리 경련하듯 뒤튼다. 아무 이유가 없어 보인다. C-6로 자런이 어떤 발견을 한 건 아니다. C-6는 결국 쓰레기통행이 되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C-6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 살고 있다. 확연한 실패를 알면서도, 끝끝내 이해하려는 정성이 사랑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상대를 껴안게 됐을 때 이해 불가한 자신도 받아들이게 되나보다. 자런의 실험 동료 빌. 남편도 애인도 아닌데 이 책에선 남편보다 애인보다 더 많이 나오는 인물이다. 자런에겐 빌이 또 다른 식물이다. 토양 분석 작업 때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땅을 파던 남자, 12살에 집 마당으로 가출해 땅굴을 파고 살았다는 남자, 오른쪽 손가락 반이 없는 남자다. 20대에 만난 자런과 빌은 ‘쥐구멍’이라고 하는 방에 살며 아침·점심은 에너지드링크로 때우는 시절을 함께 견뎠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도 또는 한없이 재잘거리며 여러 날을 보낼 수 있는 사이, 그 곁에서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관계가 된다. 이런 장면은 통째로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동료 과학자들한테 ‘없는 사람’ 취급당하던 두 사람이 알레스카의 한 언덕에서 벌인 행각을 묘사한 부분이다. 빌이 손가락 탓에 어린 시절 따돌림을 당했고 댄스파티에도 못 가봤다는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은 듯 털어놓는다. 자런이 말했다. “춤을 춰봐.” “그는 빙하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서 내게 등을 보인 채 오랫동안 거기 서서 그쪽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서서히 원을 그리고 돌기 시작하면서 발을 굴고, 사이사이 훌쩍 뛰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전력을 다해서 빙빙 돌고, 발을 구르고, 훌쩍훌쩍 뛰면서 열정적으로 춤을 췄다. 그리고 자신을 잊은 듯 몸을 움직였다. …그곳, 세상의 끝에서 그는 끝이 없는 대낮에 춤을 췄고, 나는 그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닌 지금의 그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를 받아들이며 느껴진 그 힘은 나로 하여금 잠시나마, 그 힘을 내 안으로 돌려 나 자신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도록 했다.” 책날개를 보니 호프 자런은 풀브라이트상을 세 번 받은 유일한 여성 과학자다. 글까지 잘 쓴다. 나랑 같은 40대다. 자괴감이 들어 괜히 읽었나 했다. 이 책의 장점은 그에 대한 위로도 담겼다는 것이다. 호랑이가 되고 싶다는 아들에게 자런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원래 되어야 하는 것이 되는 데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단다.” 원죄와 부활 사이 그래도 40년은 너무 긴 것 같은데. 그 무엇인가를, 그 누군가를,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끝끝내 이해하려 한다면, 어느 날 나도 그 안에서 세상의 모든 빛을 볼 수 있을까. 일일 필요 발성량을 채우러 간 성당에서 신부님이 이런 말을 했다. “원죄는 듣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고 부활은 그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자유를 주는 사랑을 내 깜냥에 죽기 전에 할 수 있을까?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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