❶한 무리의 우익 청년들이 트럭에서 급하게 뛰어내린다. 왼쪽 팔뚝에 흰 완장을 차,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고려대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제공
❷우익 청년들이 행진 대열을 위협하고 있다. 동영상에는 긴 장대를 가지고 대열로 돌진하거나 돌팔매질하는 장면이 나온다. 동영상 ‘Nationalist & Communist Demonstrators Clash’에서 갈무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고려대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제공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우익의 3·1절 기념식에는 브라운 소장 등 미군정 당국자가 참석해 축사를 하고, 전국학생연맹·서북청년회 등 우익 청년단체가 주로 참가했다. 기념식 도중에 “신탁통치 결사 반대”를 외치거나,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보내는 메시지를 결의했다. 오후 1시30분쯤 기념식을 마친 우익 단체들은 광화문에 있는 군정청과 서대문을 거쳐 서울역에서 해산하려 했지만 계속 행진했고, 4시가 거의 다 돼 남대문에 도착했다. 남산공원에서 열린 기념식 집회는 좌익 연합단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주도했고, 청년단체들이 참여했다. 기념식에서 사람들은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촉구했고 “토지를 농민에게” “조선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적은 펼침막을 내걸었다. 남산에서의 기념식은 3시에 끝나, 좌익 단체들도 남대문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좌우익 세력은 남대문 부근에서 충돌했다. 당시 신문은 “오후 4시3분 전 시위행렬을 지어 남대문에 이른 전국학생연맹과 남산에서 식을 마치고 내려오던 3·1 측과의 돌팔매가 시작되자, 경관 측에서는 이에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는데”라고 보도했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도 인정했듯, 충돌의 도화선이 된 돌팔매질은 우익 쪽이 먼저 시작했다. 이 사실은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군 통신대는 기록을 위해 주요 활동을 카메라로 찍었는데 항상 동영상도 함께 찍었다. 미군이 기록한 사건 사진이 남아 있다면, 그때 그 장소를 찍은 동영상도 함께 있기 마련이다. 사진과 동영상을 교차 비교해보면, 신문에 보도된 것 이상의 사실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충돌을 누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사진❶은 남대문 충돌을 담은 동영상 가운데 한 부분만 갈무리한 것이다. 총분량 10분56초의 동영상은 1947년 3월1일 기념식의 전 과정을 담고 있다. 동영상이 6분45초 지나서 사진❶의 장면이 나타난다. 좌우익 대열을 가르는 도로 중간에 트럭 한 대가 보이더니, 흰색 완장을 찬 청년 30여 명이 한꺼번에 재빠르게 내린다. 그 뒤 바로 나오는 것이 사진❷인데, 남대문 충돌이 시작되는 장면이다. 왼쪽에 서울시청 건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카메라가 찍는 충돌 장소는 지금의 남대문시장 쪽이다. 우익 대열 속에 여자중학교의 펼침막도 보인다. 이 사람들이 행진하는데 갑자기 우익 대열 오른쪽에 있던 청년 무리가 길 건너 좌익 행진 대열로 돌격한다. 영상을 보면, 긴 장대를 들고 돌격할 듯이 뛰어가거나, 돌팔매질을 한다. 우익이건 좌익이건 대열 사이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태에 사람들이 놀라 혼비백산 흩어졌고, 그사이 총탄 여러 발이 발사됐다. 경찰은 누구를 위해 총을 쐈나
❸민주주의민족전선이 남산에서 연 3·1절 기념 대회장의 입구. 몇 시간 뒤 이 근처에서 좌우익 행진 대열이 충돌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❹전국학생총연맹, 서북청년회 등 여러 우익 단체가 서울운동장에서 3·1절 기념식을 열었다. “이 박사 절대 지지” “38선 즉시 철폐” “신탁통치결사 반대” “미소 양군 즉시 철퇴” 등이 쓰인 펼침막이 보인다. 1947년 3월1일 미 육군 통신부대 촬영.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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