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 사이트 ‘송앤라이프’ 운영하며 내일을 꿈꾸는 작곡가 윤민석씨
“추억으로 운동을 얘기하면서/ 사는 일이 힘들다 핑계대면서/ 하나 둘씩 떠나가는 이들을 보면 얼마나 넌 외로웠을까.”(<약속> 가운데)
윤민석(37)씨는 지난해 12월 ‘송앤라이프’라는 민중가요 사이트(www.songnlife.com)를 열면서 얼마 전 작곡한 이 노래를 첫곡으로 올렸다. 추억삼아 운동을 이야기하면서 동료들이 국회의원으로, 증권맨으로, 벤처기업가로 떠나갔을 때 어렵게 살면서 자신의 신념을 이어가다가 암으로 세상을 뜬 한 친구를 그리며 만든 노래다.
‘상품화’는 갈 길이 아니더라
요즘 20대들에게 윤민석이라는 이름은 낯설지만 그는 민중가요와 대중가요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던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스타작곡가였다.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백두산> <전대협진군가> <편지> <서울에서 평양까지> 등 대학 시절부터 그가 만든 노래들은 학교에서, 거리에서 가장 많은, 그리고 가장 큰 목소리로 불렸다. 음악인들조차 민중가요라는 말을 낡은 유품처럼 받아들이는 요즘도 그는 민중가요 작곡가다. ‘송앤라이프’는 힘잃은 민중가요의 원활한 재생산과 자체 유통구조 확보를 위해 만든 사이트다. “밀린 숙제 하는 기분으로” 매주 한두곡씩 새로 만들어 MP3로 올려놓는 곡이 두달여 만에 12곡에 이르렀다. 벌써 음반 한장이 나올 만한 분량이지만 앞으로도 모든 노래는 MP3로 무료 보급한다는 게 이 사이트의 계획이다. “프로메테우스를 운영하면서 민중가요가 상품이 되는 순간 득이 되는 것보다는 잃는 게 더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92년 민족해방애국전선 사건으로 3년 복역한 뒤 96년 민중가요 전문 레이블 프로메테우스를 만들면서 그는 민중가요를 가지고 상업가요판에 연착륙하려다 쓰린 좌절을 맛봤다. “음반 들고 방송사를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취지나 음악에 공감하는 담당자들조차 음악을 틀지는 못했어요. 상업방송의 구조적 한계가 있으니까요.” “음향이 왜 그러냐”, “그래서 민중가요는 안 된다”는 핀잔을 받으며 자본의 벽에 부딪힌 그는 “찌라시 만드는 기분”으로 돌아가 이 사이트를 준비하게 됐다. 사이트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집을 담보잡고 대출받아서 이 작업을 시작했을 때 가까운 친구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그래, 너만은 변하면 안 돼”와 “아직도 이 짓을 해? 할 만큼 했잖아”. 돈이 모자라 혹시나 찾아간 각별한 후배에게 “와, 민중가요라니, 정말 신선한걸”이라는 말을 듣고는 목구멍에 맴돌던 이야기가 식도 아래로 쑥 내려갔다. “얼마 전 딸아이를 낳았어요. 분유 사러 가면 요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요. 천원 더 비싼 분유통 잡고 만지작거리는 제가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도 한두번 바보짓하면 바보지만 십년 이상 하면 그때는 바보가 아니라는 호철이 형 말이 많은 힘을 주지요.” 윤씨와 함께 민중가요의 양대산맥이었고 지금은 ‘노동의 소리’ 사이트를 운영하는 김호철씨는 이웃에서 작업실을 운영하며 더없이 좋은 동네친구이자 음악적 동료로 윤씨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후원회원, 재생산의 모델 “민중가요가 이제 더이상 관심을 끌지 않는다는 건 부차적인 문제예요. 안타까운 건 남아 있는 한 움큼의 사람들이 위축돼서 돈 십만원에 서로 쉽게 상처입고 삭막해져가는 모습입니다. 이 사이트의 첫 취지는 공감하는 사람들이 같이할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드는 거였어요.” 민중가요를 하는 후배들을 위해 무료로 미디어와 작곡 강좌를 매달 준비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지금까지 사이트에 등록된 회원은 1200여명. 그 가운데 100여명은 한달에 1만원씩 내는 후원회원이다. 더디겠지만 그가 꿈꾸는 후원회원 수는 1천명 정도다. “후원회원 체계를 잡는 건 이 사이트의 중요한 목표예요. 안정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한 하나의 모델이 되면 아까운 재능을 일반 가수들의 백밴드로 묻어버리는 후배들에게 다른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박승화 기자)
요즘 20대들에게 윤민석이라는 이름은 낯설지만 그는 민중가요와 대중가요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던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스타작곡가였다.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백두산> <전대협진군가> <편지> <서울에서 평양까지> 등 대학 시절부터 그가 만든 노래들은 학교에서, 거리에서 가장 많은, 그리고 가장 큰 목소리로 불렸다. 음악인들조차 민중가요라는 말을 낡은 유품처럼 받아들이는 요즘도 그는 민중가요 작곡가다. ‘송앤라이프’는 힘잃은 민중가요의 원활한 재생산과 자체 유통구조 확보를 위해 만든 사이트다. “밀린 숙제 하는 기분으로” 매주 한두곡씩 새로 만들어 MP3로 올려놓는 곡이 두달여 만에 12곡에 이르렀다. 벌써 음반 한장이 나올 만한 분량이지만 앞으로도 모든 노래는 MP3로 무료 보급한다는 게 이 사이트의 계획이다. “프로메테우스를 운영하면서 민중가요가 상품이 되는 순간 득이 되는 것보다는 잃는 게 더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92년 민족해방애국전선 사건으로 3년 복역한 뒤 96년 민중가요 전문 레이블 프로메테우스를 만들면서 그는 민중가요를 가지고 상업가요판에 연착륙하려다 쓰린 좌절을 맛봤다. “음반 들고 방송사를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취지나 음악에 공감하는 담당자들조차 음악을 틀지는 못했어요. 상업방송의 구조적 한계가 있으니까요.” “음향이 왜 그러냐”, “그래서 민중가요는 안 된다”는 핀잔을 받으며 자본의 벽에 부딪힌 그는 “찌라시 만드는 기분”으로 돌아가 이 사이트를 준비하게 됐다. 사이트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집을 담보잡고 대출받아서 이 작업을 시작했을 때 가까운 친구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그래, 너만은 변하면 안 돼”와 “아직도 이 짓을 해? 할 만큼 했잖아”. 돈이 모자라 혹시나 찾아간 각별한 후배에게 “와, 민중가요라니, 정말 신선한걸”이라는 말을 듣고는 목구멍에 맴돌던 이야기가 식도 아래로 쑥 내려갔다. “얼마 전 딸아이를 낳았어요. 분유 사러 가면 요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요. 천원 더 비싼 분유통 잡고 만지작거리는 제가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도 한두번 바보짓하면 바보지만 십년 이상 하면 그때는 바보가 아니라는 호철이 형 말이 많은 힘을 주지요.” 윤씨와 함께 민중가요의 양대산맥이었고 지금은 ‘노동의 소리’ 사이트를 운영하는 김호철씨는 이웃에서 작업실을 운영하며 더없이 좋은 동네친구이자 음악적 동료로 윤씨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후원회원, 재생산의 모델 “민중가요가 이제 더이상 관심을 끌지 않는다는 건 부차적인 문제예요. 안타까운 건 남아 있는 한 움큼의 사람들이 위축돼서 돈 십만원에 서로 쉽게 상처입고 삭막해져가는 모습입니다. 이 사이트의 첫 취지는 공감하는 사람들이 같이할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드는 거였어요.” 민중가요를 하는 후배들을 위해 무료로 미디어와 작곡 강좌를 매달 준비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지금까지 사이트에 등록된 회원은 1200여명. 그 가운데 100여명은 한달에 1만원씩 내는 후원회원이다. 더디겠지만 그가 꿈꾸는 후원회원 수는 1천명 정도다. “후원회원 체계를 잡는 건 이 사이트의 중요한 목표예요. 안정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한 하나의 모델이 되면 아까운 재능을 일반 가수들의 백밴드로 묻어버리는 후배들에게 다른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